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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10. 총 담 (叢 談 ) [1-4]

by choijooly 2024. 6. 4.

玉山齋 전경

 

10.총 담 (叢 談 ) [1-3]에서 계속

10.총 담 (叢 談 ) [1-4]

O 무반촌(無班村)의 연호잡역(煙戶雜役) 면제

시조 문성공 최아(崔阿)의 12세손이고 판서공 최득경(崔得逕)의 7세손인

진사공 세강(世康)께서 지금의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에 임진ㅁ와란을 피하여

부명(父命)에 따라 무주공산인 이곳에 시거(始居)하여 사람이 살수있는 근거를

마련하였으나,가세가 빈한하여 농사를 짓고 살지만 반호(班戶)에 대한

감역지전(減役之典)을 입지 못하였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1850년 경술 11월에 유학 최상필(崔祥弼),최상철

(崔祥喆),최영환(崔英桓) 제공이 진주 목사에게 청원하여 죽곡촌에 사는 전주

최씨는 영남의 벌족이고 진주 연계안(蓮桂案)에도 조상이 4세에 걸쳐 등재된

가문이므로 반호(班戶)에 대한감역지전(減役之典)을상서(上書)한 것을 비롯하여

같은 해 12월 선산(善山)의 생원 최윤식(崔允植), 고성의 전 부사 최섭(崔涉),

진주의 생원 최모(崔某) 제공이 1866년 7월 까지 5차례에 걸쳐상서(上書)한 바

1866년 7월 초 6일 연계재(蓮桂齋)에서 연호잡역(煙戶雜役)을 면하는 완문(完文)

이 내려져 반호(班戶)의 열(列)에 오르게 되었다(진사공파 개요)

 

O양자(養子)도 계약하고 예조(禮曹)에서 인증서 받다.

우리나라에서는 후사(後嗣)가 없을 때 동종방계(同宗傍系)의 자(子)를 양가

부모의 동의하에 양자를 세워서 신고할 수 있고, 아버지가 죽고 없을 때에는

어머니가 관청에 신고하여 인증(認證)을 받도록 하는 법이 있었다.

이에 따라 후사가 없는 자는 양자하여 후사를 잇고 족보에는 계자(系子)로

표기하고 있다.그런데 이 양자를 세울 때 양자를 주는 사람과 이를 받는 사람과위

사이에 문서가 작성되고 이 문서를 인제공파 최열(崔烈), 찰방공파 최락서

(崔洛瑞)양씨가 보관하고 있어 소개한다.

 

O최열(崔烈) 보관문서 (요약)

* 도광(道光) 16년(1836년)병신 2월 초 7일 양자를 정하여주고 받는문서

 

위 문서는 족숙 운영(雲永)의 장자 중식(重植)이 불행하게도 후사가 없어

족질 상갑(祥甲)의 제3자인 문석(文錫,譜名 演 출계후 炳字改名)을 양자로

정하고 문서를 교환한다. 양자를 주는 입회인 문장(門長) 최규환(崔奎煥),

받는 입회인 문장(門長) 최용우(崔龍羽), 보증인 유학(幼學) 최상각(崔祥珏),

서사(書士) 유학 최필수(崔必壽)

 

O예조 하달 인증서(禮曹下達認證書)

이 인증서는 후사를 잇는 일로 예조에 진정한 서장(書狀)인데,선산(善山)의

죽은 진사 최병우(崔炳宇)가 후사가 없어 그의 처 이씨가 가장(家長)의 8촌

형인 징(澄)의 제2자 원룡(元龍)을 세워 후사를 삼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

사실 여부를 살펴보니 이씨가 진술한 바와 같이 가장의 적첩(嫡妾) 모두

무자인데 본인이 죽었으므로 원룡(元龍)을양자 삼기로 한 양가 합의가

틀림없다. 최징(崔澄)의 서장(書狀)내용, 이씨 편지,문중장로(長老) 최서우

(崔瑞羽)의 확인 조항이 증명하고 있다고 하였다.

(주)최중식(崔重植 20世): 인재공 최현의 후이고 통덕랑공 최장우(崔章羽)의 손

(주)최연(崔演 21世):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구헌공 최상갑(崔祥甲)의 자

(주)최징(崔澄 21世):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치암공 최상우(崔祥羽)의 자

 

O최락서(崔洛瑞) 보관문서(요약)

건륭(乾隆) 4년 (영조 15년 1739) 기미 6월 초 4일 사제(舍弟) 익회(益會)의

처소에서 일찍 신병으로 불행하게도 자식이 없어 나의 둘째 성대(成大)를

부모의 유명(遺命)에 따라 익회의 뒤를 잇게 허락하고 양자를 받는 익회는

신명(身命)이 기구하여 무자(無子)로 가형(家兄)의 둘째 성대(成大)를 후사로

잇게 한 유언을 봉승하여 후사를 이어 세운다. 문중장로 최진극(崔震極)이

문서를 예조에 진정하였다.

예조에서는건륭(乾隆) 10년 (1745) 최성대(崔成大) 본인을 최익회가 양자로

받아 드리는 것이 합당한 일임을 인증하는 인증서를 내렸다.

(주)최성대(崔成大 18世): 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생부는 산와공 최수회

(崔壽會)이며좌윤공 최익회(崔益會)의 계자(系子)

 

O 방리음(放鯉吟)에 두 기남(奇男) 얻어

전주인 최태진(崔台鎭 22世)공이 중년에 이르기까지 딸자식만있고

사내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일찍이 정암진(鼎岩津) 머리에 으르렀더니

어부가 두마리의 잉어를 잡았는데 고기가 기운 좋게 펄펄 뛰는 것을 보고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잉어 두마리를 사서강물에 놓아주고

방리음(放鯉吟) 한편을 지었더니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그대가 나의 두 아들을 살렸으니 그대는 마땅히 기남(奇男)을 낳은 것이다."

라 하였다. 과연 늦게 두 아들을 낳아서 함께 대과 소과에 올랐으며 지금에

이르기 까지 그 자손들은 잉어를 먹지 않는다라고 진양지에 실려 있다.

1867년 2월 8일에 별세하니 장례 후에 사림이 향례를

청하였다.(진양속지. 고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