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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147

세덕총람(世德叢覽)을 읽고... 世德叢覽은 崔 洛 寅 님 께서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15대 宗會長으로 受任하고 계실때 2008년 3월 종회총회시  종중의 위상제고와 숭조목종(崇祖睦宗)의 징표(徵表)로서 우리가문의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고, 선대부터 12세까지의 종중 소유 재산을 실사한전자료로 세대총람 (世德叢覽)이란 제명으로 발간하기로 의결하고2009년.4.18.발간하였다고 합니다.  세덕총람 (世德叢覽)은 우리 가문이 700여년간 걸어 온 발차취를그려낸 귀중한  역사자료가 될 것이며,또한 청소년이나 후손들에게 물려줄 소중한 교육자료가 될것입니다.이 결실이 선현이 남긴 우리 가문의 자랑스러운 보감(寶鑑)이기도 합니다. 세덕총람 (世德叢覽)은  제1편 "세덕편" 재2편 "재산편 " 제3편"참고편"으로 [총 497쪽(표지,간지 제외)] 구성.. 2024. 6. 4.
10. 총 담 (叢 談 ) [1-4] 玉山齋 전경 10.총 담 (叢 談 ) [1-3]에서 계속10.총 담 (叢 談 ) [1-4]O 무반촌(無班村)의 연호잡역(煙戶雜役) 면제시조 문성공 최아(崔阿)의 12세손이고 판서공 최득경(崔得逕)의 7세손인진사공 세강(世康)께서 지금의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에 임진ㅁ와란을 피하여부명(父命)에 따라 무주공산인 이곳에 시거(始居)하여 사람이 살수있는 근거를마련하였으나,가세가 빈한하여 농사를 짓고 살지만 반호(班戶)에 대한감역지전(減役之典)을 입지 못하였다.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1850년 경술 11월에 유학 최상필(崔祥弼),최상철(崔祥喆),최영환(崔英桓) 제공이 진주 목사에게 청원하여 죽곡촌에 사는 전주최씨는 영남의 벌족이고 진주 연계안(蓮桂案)에도 조상이 4세에 걸쳐 등재된가문이므로 반호(班戶)에 대한감역지.. 2024. 6. 4.
10. 총 담 (叢 談 ) [1-3] 始祖 文成公 墓所   10.총 담 (叢 談 ) [1-2]에서 계속10.총 담 (叢 談 ) [1-3 ]O농사꾼의 행운전주인 최중길(崔重吉 18世)은 조선말 철종 때 두영(斗陽)에 살았다.체구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나 그 힘을 함부로 쓰는 일이 없었다성품은 부드럽교 착하며, 매사에 성실하고 정직하여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어릴때 부터 안걔(安溪) 하일성(河一聖)의 집에서머슴갈이를 하였다.주인 하싸는 그의 사람됨을 알아 보고 뒷날 사위로 삼았다.신혼살림을 차렸으나 살림집이 남의 아래채 외양간 옆방이 었다.밤에는 소가 벽을 툭툭처서 잠을 잘수가 없엇다. 최씨는 한이 맺혀 부지런히일하여아껴사 돈을 모을것을 결심하고 " 우리부부가 이를 악물어 일 하여서돈을 모아 장차 이집을 우리 집으로 만들자.".. 2024. 6. 4.
10. 총 담 (叢 談 ) [1-2] 始祖 文成公 墓所 총담 (叢 談 ) [1-2]O꿩이 왜군(倭軍)을 쫓다.완해군 최산휘(崔山輝)는 전주인으로 인재공 최현(崔晛)의 자이다어려서 임진왜란을 당하자 해평리 동민은 모두 피난갔는데 공은6살 무렵 이웃 보리밭에서 피난중 너무 고통스러워 울먹이자, 그때 마침왜군이 그 앞을 지나 가다가 사람 소리 듣고 멈추어 서서 실피는데,그때 마침 꿩 한 마리가 푸두둥 날아오르자 왜군이 날라가는 꿩 소리인줄알고 지나쳐 갔다고 한다. 이 사실이 항간에 퍼지자 장차 나라에 큰 일을헤 낼 아이라 하늘이 돌봤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는 말이 전해졌는데,과연 공은 장성하여 광해군의 잔당인 루효립(柳孝立)의 음모를 고변(告變)하여 영사공신에 녹훈되고 완해군(完海君:完山崔氏海平居住의頭文字)에봉해졌으며 불천묘(不遷廟)가 특시(特施).. 2024. 6. 4.
10. 총 담 (叢 談 ) [1] 周德齋[始祖 文成公 齋閣]   10.총 담 (叢 談 ) [1-1]  ㅇ 전주 최씨 세헌(全州崔氏世獻)  우리 최씨는 문성공으로 부터 아래로 수백년에 걸쳐 덕학문장(德學文章)과과관훈업(科官勳業) 그리고 의행특적(懿行特跡)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고국승야사(國乘野史)와 제현의 장갈(狀喝)에 쓰여저 있다.훌륭한 후손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으나 각 파의 집단들이 산재하여 있어서한 자리에 모여 볼 수가 없다.더구나 세도(世道)가 날로 변화하여 가니 조선들의형적(形蹟)이 없어져 버릴가 두려워 문중의 연노(年老)들이 이를 항상 한탄하면서 여러번 경영하려 하였으나 미쳐 겨를을 내지 못하였다. 지난봄 도산재(道山齋)에서 모여 족장인 종호(淙鎬),문환(文煥) 양공이논의를 주장하고 용호(庸鎬),홍락(弘洛),양섭(養燮),병우(.. 2024. 6. 4.
9. 효. 열부(孝.烈婦)-4) 여행(女行) [1]- 千氏 姑婦雙烈)-崔氏 9. 효.열부(孝.烈婦)4)女行(여행)[1] ㅇ千氏 姑婦雙烈영양인 충장공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고 명조(命祚)의 딸이며.전주 최병욱공(崔秉旭公)의 처이다.본래 지성으로 시부모를 섬겼고온화함과 순종으로 남편을 모셔 친척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불행하게 큰 흉년을 당해 생계의 방도가 없자 남편의 뜻을 따라 전라남도장수(長水) 등지로 이사하자 남편이 돌림병에 걸렸다. 의원과 약을찾으며 온갖 짓을 다했으나 효험이 없자 자신의 살을 베어 구워서 먹였드니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이틀 뒤에 뒷일을 부탁한다는 밀민 남기고 세상을떠났다. 남편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남편의 당부와 사고무친한 어린 자식들때문에 닞선 객지에서 그럴 수 없다고 마음을 가다듬고 슬픔과 괴로움을참고 견디었다. 3년 뒤 아이가 13살 나던 해 자식들을.. 2024. 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