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문에 새겨진 아버지의 모습/박미혜 ♥
나의 친정집은 전주 인후동이다.
내가 사는 여의동에서 승용차로 25분이면 도달한다.
그래서 나는 노부부만 사시는 친정집에 자주 간다.
지난 주말에 부모님과 점심 외식을 위해
친정집으로 달려갔다.
모처럼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서다.
나는 유명 식당에 예약을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자
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채더니 팥죽집으로 가자고 하신다.
치아가 부실한 아버지는 평소 팥죽을 좋아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잠바를 주섬주섬 입으시면서
“팥죽 먹자, 내가 먼저 가서 줄 서 있을 테니
엄마랑 천천히 오너라” 하시며
평소 다니던 팥죽집을 향해 가셨다.
나는 어머니와 팔짱을 끼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주고받으면서
한참을 팥죽집을 향해 걸었다.
팥죽집에 도착해 보니 벌써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팥죽 한 그릇 먹으려고 이다지 사람들이 몰려들다니.
예전에는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 해서
동지 팥죽을 먹었는데 요즘에는 사시사철
팥죽을 먹는 시대가 되었다.
팥에는 여러 효능이 있다.
특히 비타민B 등 단백질이 풍부하다.
이 비타민B가 현대인들의 피로를 개선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그럴까, 아무튼 팥죽이
웰빙식품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먼저 가신 아버지는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해놓고 줄 속에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와 난 서로를 바라보고 씨익 웃으면서
팥죽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벌써 아버지는 자리를 잡고
식탁에는 숟가락과 수저를 나란히 놓고 앉아 계셨다.
순간, 아버지가 우리를 보더니
손을 높이 들고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는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기다리는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아버지의 센스 덕에
쉽게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팥죽집 홀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음식을 나르는 종업원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잠시 후 보리밥에 열무와 된장국이 덤으로 나왔다.
이윽고 보랏빛 팥죽 세 그릇이
큰 스테인리스 그릇에 가득 담겨 식탁에 올려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새알심이
둥둥 떠 있는 팥죽이 구미를 당겼다.
아버지는 팥죽 한 수저를 떠서 입 안으로 넣더니
“참 맛있다, 어서 먹어라” 하신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팥죽을 드신다.
마치 여름철 보약이라도 드신 것처럼 말이다.
사실 아버지는 요즘 치과 치료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하신다.
그래서 그런지 팥죽 한 그릇을 금세 비웠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 내 마음이 짠했다.
우리는 팥죽을 먹고 집까지 걷기로 했다.
걸으면서 아버지는 이도 없으면서 이쑤시개로 이를 쑤신다.
그러면서 “큰딸 덕분에 배부르게 잘 먹었다”고
팥죽 한 그릇의 공을 내게 돌린다.
이후 친정 부모님과 나는 가끔 만나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팥죽을 한 번씩 먹게 되었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늙어가는 모습이 마음이 아팠다.
언젠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불시에 친정집을 방문했을 때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니 아버지 혼자서
라면 국물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비 오는 날엔 파전에 막걸리가 궁합이라던데
웬일로 아버지는 궁상맞게 라면에 소주이던가.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하여 한동안
아버지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내 눈빛을 보더니
멋쩍은 표정으로 눈길을 돌려 창문 쪽을 바라본다.
나도 아버지가 바라보는 창문을 응시했다.
빗방울이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흘러 내리는 빗물이 꼬불꼬불 엉키는 걸 보고
‘아버지 마음에 낙서가 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참았던 마음이 또 울컥하더니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버지의 눈가에도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로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럴 때마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자국에는
아버지의 모습도 창문에 새겨져 있다.
♥ 사는 일 / 나 태 주 ♥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음으로
마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려 온 물총새
물총새,쪽빛 날갯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은 잔잔해 지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https://youtu.be/-IID_IdiXO0?si=IGBSekSSAc5opz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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