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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마음의 비타민 글

세월이 흘러 흘러서(수필) / 문보근(영상글 첨부)

by choijooly 2024. 4. 20.

 

산속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든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 길러 오는

젊은 여인이 보였고

그 여인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앳된 아이도 보였습니다

 

무엇에 놀라 잠에서 깬 나는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그 여인은 나의 어머니였고
아이는 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흘러서(수필) / 문보근♥

 

오늘 나는

산길을 가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산속은 늪 같았습니다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나는 산속 깊이

빠져들어갔습니다

 

나는 탈진 상태가 되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급기야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든 나의 꿈속에서는

물동이를 이고 물 길러 온 여인이 보였고

그 여인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앳된 아이도 보였습니다

 

샘가에 도착한 아이는

여느 아이들처럼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샘 속을 들여다봅니다

그곳에는 봄이 들어 있었고

금방 움튼 연두색 새싹이 들어 있고

연분홍색 진달래 꽃잎도

떠 있었습니다

 

내가 바라본즉

이를 보는 아이 표정은 봄 수채화 같았습니다

아이 표정은 봄보다 더 봄스럽고

새싹보다 더 새싹스럽고

진달래 꽃보다 더 꽃스러웠습니다

 

나는 아이가 하도 귀여워

문득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내 고향 뒷산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봄이면 산새들의

오손도손한 지저귐이 정겹게 들려오고

여름에는 어머니의 부채 같은

산바람이 산 아래로 불어오는 곳,

이곳이야 말로 진정 나의 에덴,

언제나 불러 보고픈 ㅜ내 고향입니다

 

여인을 보니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어머니는 ㅜ평생 나의 우산이셨습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어머니는 우산을 들고

일 학년 일반 내 교실 창문에 매 달리셨습니다

 

유난히 키 작은 어머니는

창문에 매달리지 않고서는 나와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기에,

그런데 신기합니다

 

어머니 손잡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한 우산 속에서도

나는 비 한 방울도 맞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매번 흠뻑 젖었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도 몰랐습니다

한 우산 속에서도 어머니만 왜 흠뻑 젖어야 했는지

청년 될 때까지도 나는 몰랐습니다

 

자식을 낳고 어머니 나이가 되고서야

나는 어머니의 우산 법을 알았습니다

그때 나를 씌어준 것은 우산이 아니라

어머니 당신의 몸이었다는 것을,

바보처럼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나의 우산이셨습니다

고향 생각을 하다가 어머니 생각을 하다가

다시 샘가를 바라볼 때 조금 전 있었던

여인과 아이는 없고 웬 노인이

그 자리에 와 있었습니다

 

옷은 남루하고 인생길이 속 터지게 험준했던지

몰골이 그야말로 삭정이 그 자체로 초라했습니다

그 노인도 목이 탔는지 정신없이 물을 마십니다

한참을 마신 노인은 마시기를 갑자기 멈추고

한참을 샘 속을 들여다봅니다

 

노인은 샘 속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고개를 갸우뚱 거립니다

그러고는 몇번이고 샘가를 뒤돌아 보며

산을 내려갑니다

 

샘 속에는 무엇을 있었길래 무엇을 보았길래

노인은 갸우뚱했던 것일까

궁금해진 나는 얼른 샘 속을 들여다봅니다

샘 속에는 마시기 아까울 정도로 맑은

샘이 솟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을이 있습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들어 있고

밤송이가 달린 밤나무가 있고 오색 단풍으로

화려하게 불타는 가을 산이 있습니다

 

나는 또 궁금해졌습니다

노인은 왜 고개를 갸우뚱했을까

지금까지 본 것만 가지고는

노인이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사유가 없는데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들여다본 나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도망치듯 허겁지겁 산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뛰어 내려가는 내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너무 불쌍했습니다

너무 가엾고 치근해 보였습니다

샘 속에서 내가 본 것은 꿈에서 보았던

나의 어머니와 어린 내가 있었습니다,

 

나는 차마 어머니와 아이를 샘에 두고

산을 내려갈 수 없어 그 샘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어머니와 아이는 간데없고

노인만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흘러서

어머니는 저 세상으로 떠나셨는지

아이는 늙어 노인이 되었는지

지금 내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감동수필] 세월이 흘러 흘러서 / 문보근 낭독 / 김동현 (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