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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옥산제(玉山齋) -- 기문(紀文) --

by choijooly 2024. 4. 29.

 

2.안렴사공 용생 2세(按廉使公龍生2世)

 

* 옥산제(玉山齋)

 

-기문(紀文)-

고성의 북쪽 30리 밖 옥녀봉 아래 당산 마을이 있으니 이곳이 전주최씨의 세장

이다. 여기에 종론으로 안렴사공 휘 용생을 추모하는 제실을 창건하였으니 안렴사공

은 시조 고려문하시중 시(諡) 문성공 최아(崔阿)의 장자이시다.공은 성품이 강직 염

정하였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에 오르고 대간(臺諫)으로 봉직 때 국정의

문란함을 직간하다가 외직인 경상도 안렴사가 되었는데,계속되는 악정을 성토 게방

(揭榜)하여 백성에게 알리자 김유경(金有謙)을 후임으로 보내니 이로 인하여 사천에

옮겨 살게 되었다. 묘(墓)는 사천 정동면 풍정동 곤향에 있다고 하나 실전하여 이곳

에 서기 1924년 갑자에 재실을 창건하고 설단 향사하게 되었다.그러나 재실이 세구

훼손으로 품위를 잃었고 단바가 재실 뒤쪽 협소한 곳에 있어 많은 자손들이 참사하는

데 불편하여 서기 2000년 경진에 이전하기로 종의를 모아 족보 수찬으로 마련된 기

금과 자손들의 헌성으로 부지를확보한 후 계미년에 시역하여 3년 만에 웅장한 재실을

필역하였다.

 

단각에는 안렴사공 단비와 서기1947년 정해 도산서원 경내에 세워진 정랑공 최전

우(崔田雨), 위전공 최택(崔澤), 개령현감공 최자경(崔子涇)의 계비(繼妃) 의인(宜人)

진주강씨, 이안현감 증 도승지공 최수지(崔水智) 배(配) 숙부인 함평모씨, 군수공

최이식(崔以湜), 첨사 증 병조참판공 최윤신(崔潤身)과 배(配) 정부인 진주강씨 제위의

실전 선세 단향 비(失傳先世壇享碑)를 옮겨 세우고 세향(歲享)의 예를 올리게 되었다.

이에 재호(齋號)를 옥산재(玉山齋)라 함은 풍정동 옥수골의 지명을 따라 이름하였는데

이번에도 당산마을에 있는 옥녀봉(玉女峰)의 산명(山名)을 따라 그대로 옮겨 쓰기로

하였다. 문액(門額)은 일원(一源)이라 하였는데 이는 한 뿌리 자손들이 조상을 우러러

숭배하며 거룩하신 유덕을 본 받는다는 뜻이다.이 재실에 앉아보면 멀리 펼쳐진 넓은

들판과 이를 횡유하는 구만천(九萬川)이 조화를 이루었다.

 

필봉산은 위엄있게 후방을 방위하고 곤계봉은 중세 현조의 유지로서 전방을 호위하

며 옥녀봉은 병풍처럼 둘러있어 옥산재 건립을 예견한 산명(山名)이라 이 어찌 길지가

아니리오. 아 아 ! 우리 조옥의 숭조 애문의 터전이 바로 이곳이로다. 돌이켜 보면 공의

본의 아닌 사천 유거(幽居)로 가세가 유락하여 수세에걸쳐 진주 함안 고성으로 전거하

면서 가승이 멸실되고 묘지가 실전되었으니 후손으로서 죄스럽기 그지없도다. 그러나

한성우윤공 담(潭)께서 입고성(入固城) 후 세거 500년에 자손이 번성하여 훈업과 석

학이 면면이 계승되어 이 고을의 명문으로 자리잡고 이 나라 굴지의 벌열(閥閱)로 번창

하였으니 앞으로 천추토록 민몰됨이 없으리라.바라건대 모든 자손들은 언제나 초지일관

하여 재실 보전과 추모 봉사에 진력하는 길만이 보본의 도임을 깨달아 청금전성(靑衿展

省)이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열성을 다할지어다.

 

이 역사는 락서(洛瑞) 추진위원장의 헌신적인 노력과 주도 면밀한 감역으로 이루

어졌기에 그 공로를 아울러 찬양하는 바이다. 나에게 재기(齋記)를 청하기에 졸문이라

사양하였으나 자손 된 도리로 마지못하여 졸필로 옥산재의 기(記)에 가름 하노라.

 

서기 2006 년 병술 월 일

 

후손 원 호(元 鎬) 근기

 

- 주 련(柱 聯) -

옥산재 높이 지어 근엄하게 내려보니, 자연경관 어우러져 고을(洞)이 빛이 나네.

한줄기 원천에서 이어진 효심으로 많은 자손 힘을 합쳐 전통 지켜서 끼친 덕 받들어

영원토록 모시리라.

(翼然齋宇 玉峯誌陽 雲林改觀 洞塾增彩 一源孝水 不渴涓涓 百世仍孫

聿修 齊齊 慶慕遺德 報祀罔훤)

( 華齋李雨燮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