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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마음의 비타민 글

"오래된 편지" / 문보근 (영상글 첨부)

by choijooly 2024. 5. 27.

 

남편이 떠난 후 집을 찾아온 남편의 편지

"오래된 편지" / 문보근

 

남편은 무뚝뚝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처음 볼 때부터

그런 남편이 좋았습니다

 

말수는 적지만 말로 때우는 그런 사람 아닌

행동으로 엄마한테 감동을 주며

알콩달콩하게 사셨던 친정아버지를 떠올리며

무조건 남편이 좋았습니다

 

나도 말수가 많은 여자는 아니었기에

결혼 전 남편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천생연분이라고요

 

결혼하면 말 때문에 싸울 일이 없을 거라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부픈 신혼을 꿈꾸며 우리는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간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는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렵게 살지만

말로 서로를 격려해 주며 훈훈하게

살아가는 친구의 결혼 생활이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인데

그 친구의 집안 온도는 언제나 포근 했고

우리 집안은 늘 냉랭했습니다

 

무뚝뚝한 성격이 좋아 사랑하게 되고

결혼까지 했는데 말수가 적은 이유로는

싸울 일이없을 거라고 그렇게

좋아했던 우리였는데

 

그랬던 내가 이제는 말 좀 하며 살자고

조르게 되고 그런 내 성화에 우리는

참 많이도 싸웠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내 성화가 더 심해질수록 몇 마디씩 했던 말도

아예 말문을 닫아 버렸고

나는 말에 목숨건 여자처럼 말좀 하자며

악을 쓰며 남편에게 대들었습니다

 

오십 번째 내 생일날이었습니다

그날이 내 생일인 줄도 모르고 있는 남편을 보는 순간

이런 남편한테 내 인생을 걸고 사는 내가

한심하고 억울해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날로 사납게 변해가는 나를 내가 보아도

좀 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남편이

그일로 집까지 나갈 줄은 몰랐습니다

 

찾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집을 떠나는 남편

그런 남편을 보면서도 잡으려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나는 오히려 속이 시원했습니다

 

간간이 남편 생각은 났지만 앓던 이 빼버린 사람처럼

룰룰 라라 지내는 동안

코스모스꽃이 두어 번 피었다가 지던 어느 가을날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남편이 산행 도중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져

사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나는 나쁜 여자가 되어 있었는지

그런 슬픈 소식에도 내 마음은 덤덤했습니다

 

어느새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통곡하게 만든 일이 생겼습니다

 

경찰관한테 건네받은 유품 중에

나에게 보내려고 썼다가 미처 부치지 못한 남편의

편지가 그것입니다

 

편지에는 나를 울리고만

이런 글이 들어 있었습니다

 

■ 그리운 당신에게 ■

 

여보

집을 나온지가

벌써 낙엽이 두 번 물들었다가 지고 있구려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그럴 용기가 나질 않는구려,

 

집을 나온 두해 동안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오

나도 남들 남편처럼

아내인 당신에게 멋진 표현 하며 살고 싶었소

 

아내란 남편의 관심과 애정으로

살아가는 존재인데

그것을 잘 아는 나이기에 그렇게 하고 싶었소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소

 

이 말은 당신에게 차마 못 했지만

사실 나는 의존증 환자였소

기피증 환자였소

말을 하려면 자신감이 없어지는

그리고 피해려는...

 

그렇게 된 데에는

태어나자마자 길에 버려진 나는

양부모에게 길러지면서 툭하면 학대를 받았소

 

버려진 주제라고 욱박지르며

자존감을 세워주지 않았소

그래서 심한 애정결핍에 빠져 기가 죽어 커왔소

 

생각으론 표현이 되는데

말로 하려면 나도 모르게 벙어리가 되었소

그래서 말에 자신감을 잃고 말았소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말수가 적기에 내가 좋다는 당신 말에

나는 마음이 아팠소

 

병적이란 것을 모르고 근엄해서 좋다는 당신 말에

나는 슬펐지만 차마 당신한테는

이 사실을 고백할 수가 없었소

 

당신이 떠나갈까 봐

날 버릴까 봐...

 

미안하오

당신 오십 번째 생일날

큰 마음먹고 생일 축하 편지를 썼지만

당신한테 전달할 용기가 나지 않아

앨범 사이에 끼어 놓고 말았는데....

그날 당신은 나한테 말 좀 하며 살자고

다른 부부들처럼 표현하며 살자고

당신은 울며 말했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당신 곁에 머무는 것은

당신에게 큰 죄를 지은 일이라 생각하고

집을 나왔는데 벌써 두해가 흘렀구려

 

여보 미안하오

나 같은 사람 잊고 새 출발 하기를 바라오

부디 행복하시오

못난 남편이....

 

철없는 아내는

얼마나 아파야 아픈 가슴 움켜쥐고 살았을

남편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나요

 

이 못난 여자 얼마나 크게 소리 내어 울어야

울지도 못하고 지내 왔을 남편 가슴에 맺힌 응어리의

크기를 알 수 있을까요

 

나는 허겁지겁 편지에 적혀있는 그 앨범을 꺼내

남편의 편지를 눈물로 읽어 내려갑니다

내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남편에 생일 축하 편지를 바보 되어 읽습니다

 

■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며 ■

 

여보

결혼 한지 꽤 오래되었지만

당신한테 생일 편지를 쓰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안 쓰던 편지를 쓰려고 하니

좀 어색하고 쑥스럽기는 합니다

그러나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을 나한테 허락한

당신인데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남편 된 자의 도리라고 생각했기에

이렇듯 두서없는 글이지만 써내려갑니다

 

여보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나에게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당신이 태어났다는 것은

나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장차 나에게 큰 감동이 될

내 아내가 움텄다는 기쁜 일입니다

 

소년 시절에

이유 없이 가슴이 설레인 건

아마도 어딘가에서 꽃보다 더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을

당신 때문이었겠지요

 

밤마다 창문을 열고

까닭 없이 차오르는 어떤 그리움에 까만 밤하늘을

끝없이 바라보았던 것도 어딘가에서 있을

당신 때문이었겠지요

 

당신을 만날 때 나의 밤은

당신의 얼굴를 그리다가 밤을 지새웠고

당신과 결혼한 후 나의 밤은

온통 무지개만 뜨는 밤이었습니다

 

여보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지금껏 내가 인생이란 항로에서 행복의 돛단배를

띄운 건 당신이 흘린 땀과 눈물이 바다가 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만일,내 인생을 책으로 표현한다면

가장 감동적인 한 구절은 바로 당신입니다

 

전 날이나 먼 훗 날이나 행복했던 순간을 말하라라면

그건 아름다운 당신 마음에

머문 그 순간입니다

 

당신은 나의 오픈무대이자

앤딩무대입니다

 

살아 오면서 잘한것에

내가 나한테 표창장을 준다면

당신을 선택한 것입니다

 

거듭 오십 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절망적인 내 인생을 희망으로 바꿔준 당신을

사랑하고 사랑합니다

[감동수필] 남편이 떠난 후 집을 찾아온 남편의 편지 "오래된 편지"/문보근 낭독/김동현 (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