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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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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일기장/문보근 (영상글 첨부)

by choijooly 2024. 8. 9.

 

 

 

♥ 엄마의 일기장 / 문보근 ♥

 

사람이 늙으면 아픈 것은 당연한데
아픔도 모르는 병, 아픔도 모르는 치매는
왜 걸리는 것인가,

나는 시골에 홀로 계신 엄마한테
하루에 두 번씩 전화를 한다
아침엔 밤사이 편히 주무셨는지 안부를 묻고
밤에는 하루를 어떻게 지내셨는지
그것이 궁금해 나는 전화를 한다

전화할 때마다 엄마는 특이한 장난기 어린
농담으로 날 즐겁게 해 주셨다

그날도 엄마는 나에게 장난스런 말을 하셨다
배고파서 못살겠다고 하신다
저녁은 안 드셨냐고 묻는 나의 말에
저녁이 뭐냐고 엄마는 되묻는다

그렇게 농담하시는 엄마가 나는 좋았다
옛날 여인답지 않게 낙천적이고 호탕하신
엄마 성격이 편해서 나는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나에게 느닷없이 화를 내신다
자식 키워 다 소용없다, 하시며
매일같이 전화해 온 나에게
한 달 넘도록 전화 없는 나뿐 자식이라 하신


전에 없던 강한 어투로 말씀하시는 엄마가
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난 이렇게 생각했다
엄마가 많이 늙으셨구나 늙으니 외로워지고
외로워지니 그 위로움을 저렇게도 표현을
하시는가 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엄마의 그런 돌발적인 행동을
단순히 외로움쯤으로 여겨버린 나,
이젠 서울로 모셔야 할 때가 왔구나, 하고
생각한 나

서울에 모셔 함께 살면 엄마의 외로움도
사그라지겠지 하고 생각한 나는
서울로 모시기 위해 시골집에 갔는데

아아
엄마는 외로움이 아니었다
엄마는 치매였다

지금 엄마의 모습은 지난 구정에 보았던
그때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집안도 이곳이 우리 집이 맞나 싶었다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었다

반년 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가
납득이 가질 않는다

마당엔 풀은 한마당이고
싱크대위에는 설거지를 기다리고 있는
그릇이 한가득이고
청소는 언제 하셨는지 그야말로
집안이 온통 쓰레기 천국이었다

매달 생활비도 보내드리고
틈틈이 맛난 음식도 배달해 드렸는데
그것만으로도 냉장고는 차고도 넘쳐나야 하는데

냉장고 안은 텅텅 비어 있고
뒤주에도 약간에 쌀만 남아 있었다

문득 생각난다
언젠가 전화 통화에서 농담으로 들었던
배고파 못살겠다는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금방 밥 먹고도 돌아서면 밥 달라고
조르는 것이 치매병이라 하더니
엄마는 온종일 먹고 또 먹고 그랬을까

마루 끝에 앉아 처음 보는 사람 보듯
날 바라보시는 엄마,
너무 기막혀 눈물도 안 난다

내 눈물을 끝내 쏟게 한 것은
집 정리하다 눈에 띈 엄마의 일기장,
그 일기장이 나의 억장을 무너트리고 말았다

일기장 안에는 이런 일기가 적혀 있었다

2022년 8월 15일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추석인데 역병으로 못 온다고 한다
나는 보고 싶은데 아들은 못 온다고 한다
며느리와 꽃 같은 손주를 내내 기다렸는데
아무도 못 온다 한다
달은 뭐야 좋아 저리도 밝은가
눈치도 없어라

2023년 1월 1일
참 좋다, 이리도 좋다
아들 며느리 손주들 다 모였다
물론 모두 다 마스크로 얼굴이
반쪽만 보이지만 그래도 좋다
참 좋다 이리도 좋은 걸
춤이라도 방실방실 추고 싶은 날이다

2023년 3월 1일
경로당에 갔다
화투를 쳤는데 계산이 안된다
화투짝을 맞추는데 이 짝이 저짝같고
저 짝이 이 짝같다
새벽녘 카바이드 등불처럼
정신이 흐릿해져 간다
집에 돌아와 나는 아들 사진을 본다

2023년 4월 1일
요즘 내가 이상해져 간다
정신이 깜박 깜빡거린다
오늘이 며칠인고 달력을 짚어본다
텃밭에 상추를 심어야 하는데 나는 그냥 있다
제비도 지 혼자 지껄인다
사는 게 왠지 눈물이다
오늘도 아들 사진 보며 마음을 달랜다

2023년 4월 15일
비가 내린다
맹꽁이가 운다, 경로당에서 전화가 왔다
다 귀찮다
차라리 그 시간에 아들 사진을 본다
어미 잘못 만나 고생만 하고 있는 울 아들
비가 저리도 내리는 데
울 아들 우산이라도 제대로 쓰고 다니는지
불쌍한 내 새끼, 보고 싶다

2023년 5월 9일
꽃다발이 배달 왔다
아들이 어버이날이라고 보내준 꽃다발
참 예쁘다 꽃이
나는 모처럼 웃는다
이래서 자식 낳고 사는가 보다
매일 감동으로 받는 아들 전화인데 오늘따라
아들 전화는 나를 눈물반 웃음반 짓게 한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 건강하세요
엄마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하는 아들 말에
나는 꽃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2023년 6 월 2일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사회 복지사가 왔다
이름이 뭐냐고 내게 묻는다
나는 되물었다, 내 이름이 뭐 냐고,
내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왜 이렇게 되어 가는지 나도 모르겠다
온통 머리가 하야져 간다
나는 아들 사진을 또 꺼내본다

2023년 6월 20일
매일 아침이면 오던 아들 전화가
한동안 오지를 않는다
나는 슬그머니 화가 났다 
그래서 내가 전화를 걸었다
이제는 전화도 하기 싫어졌냐고
키워놓으니 다 소용없다고 심하게 퍼댔다
아들은 웃으며 말했다
엄마 오늘 아침에도 전화 했는데요 한다
나도 나 자신이 답답하다
기억이 났다 안 났다 한다

2023년 7월 10일
이젠 아들 기억이 없다
처음 본 전화번호로 전화가 왔다
모르는 남자다
나는 배고픈데.. 그냥 끊었다

2023년 7월 11일
그 남자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
난 그냥 끊었다

2023년 7월 12일
또 왔다 그 남자한테서,
기다리는 아들한테는 안 오고...

2023년 7월 13일
아들아 보고 싶다

2023년 7월 14일
보고 싶다

2023년 7월 15일
........
엄마 엄마 엄마
아니지? 정말 아니지,치매 아니지?
엄만 날 놀랐게 하려고 지금 쇼 한 거 맞지?

나쁜 자식,나쁜자식, 이렇게
한마디 말이라도 한번 해 봐,제발, 엄마,

엄마와 나의 첫 만남이란
나는 엄마를 모르는 채 엄마를 만났고
엄마는 나를 알면서 날 만났다가

엄마와 나의 이별이란
엄마는 나를 모르는 채 떠나야 하고
나는 엄마를 알면서 보내야 하는 것이
엄마와 나의 숙명인가

지금 엄만 날 바라보고 있다
지금 엄만 내 손을 잡고 있다
지금 엄만 미소를 짓고 있다

하지만 엄마는 날 모른다

나에겐 엄마가 있는데
엄마에겐 지금 아들이 없다

그래서
아들은 목놓아 운다

뜻 모르는 제비들만 처마밑에서
요란스럽게,
요란스럽게 사랑스럽다, 

눈치도 없이

 

--<감동 좋은 글> 중에서--

[감동수필]엄마의 일기장 / 문보근 (낭독 정환기)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