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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5. 정재(亭齋)-가양재-가천정-갈파정-고산재-관암대-구남서실

by choijooly 2024. 5. 1.

가양재(佳陽齋)  

 

5.정 재(亭 齋)

 

정각(亭閣)은 정자(亭子)를 말한다. 정자는 산수경치(山水景차致)가 좋은 곳에

놀기 위하여 지은 집.또한 정육(亭育)하는 곳, 즉 후손들 교화 양육하는 곳도

된다.재(齋)는 재사(齋舍).재원(齎院:제사 전일에 참사자가 재계

(齎戒)하는 곳). 재실(齎室)이라는 뜻이다.

 

ㅇ 가양재(佳陽齎)

 

고성군 개천면 가천리 80-1에 있다.해정공의 8세손이고 은재공 최명대 천

(崔鳴大)의 증손인 성재공(省齎公) 최필숭(崔必嵩)이 분가 신축하여

생활하였던 유서 깊은 집터에 후손들의 성력으로 1993년 재실을 건립하였다.

안산에 모셔진 공과 배위를 비롯하여 자(東信) 손(圭鎰) 증손(章鎬)까지의

묘소 합봉과 쌍봉을 수호하고 매년 시향 장소로 하며 때로는 소종증 행사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가양재(佳陽齎)는 마을 이름의 가(佳)와 만물

소생의 양지를 뜻하는 양(陽)을 따서 재호(齎號)로 하고 주련(柱聯)에는

『 이 마을은 옛 부터 개천이라 불러 왔다.좌우로둘러싼 산의 정취는

내 정원과도 같구나.이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농사짓고 책 읽으니,

자손들의 성공담 전해 옴을 기다릴 뿐이라네>

(里號介川自古傳 環山左右林泉 此間亦有漁樵樂第待邱園玉 ?箋) 』

하였다. (최탁림)

 

ㅇ 가천정(可川亭) 

 

가천정(可川亭)

 

고성군 개천면 청광(固城郡介川面淸光)에 있다. 유림들이 계를 모아 한 구역을 사서 거기다가 정자를 지어

가천공 최정기(可川公崔正基)가 서재를 만들어 학문을 닦고 공부하게 하여 주었다.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니, 나무들은 알맞게 어울려 있고,샘터와 바위가 아름답구나.

(負山臨水樹木扶疎泉石明麗)』라고 선비들은 읊었다.(진양속지. 환여승람.고성지)

(주)최정기(崔正基 24世)-찰방공 최진호의 11세 손(필자의 曾祖父)

 

 

ㅇ 갈파정(葛坡亭)

 

고성군 대가면 갈천에 있는데 처사공 최필학(崔必鶴)이 독서하던 곳이다.

(고성지)

 

(주) 최필학(崔必鶴 21世);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최시대공(崔始大公)의 증손(譜名 秉龍)

 

ㅇ 고산재(古山齎)

 

고산재(古山齋)

 

 

고성군 마암면 삼락리 고장산(古長山)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 있는데 이름하여 욋골(外洞)이라 한다. 땅은 비옥하며

평평한 들은 오목 깊숙하여 농사짓기 좋고 바다가 깊숙이 들어와

살짝 감추어진 지형이다. 소호공 최균(崔均)의 증손인 처사공 최유중

(崔由重)이 구만 세장(九萬世庄)에서 이곳으로 옮겨 덕을 숭상하고

전원을 가꾸며 시끄러움을 마다하고 청렴하게 살아온 세월이 우금

200여 년이라 후손들은 근검하고 치산(治産)하여 아쉬움 없이

효제충신하며 마음의 선당을 중히 여겨 왔었다.후손중 최우열(崔又烈)

최만순(崔萬淳) 양공이 주축이 되어 성력을 모아 이곳에 처사공

(崔由重)의 재실을 지어 주산(主山)의 이름을 따라 고산재(古山齎)라하였다.

 

최만순공이 족형되는 중암공 최양섭(崔養燮)에게 청하여

기문을 지었는데『재실을 지어서 두고두고 조선(祖 先)을 흠모함은 비단

재력이 넉넉해도 어려운 일인데 지금 우열공(又烈公)과 만순공(萬淳公)이

주축이 되어 9세손 진호(進鎬)는 대지(垈地)를 희사하고 행랑 마당터를

7세손 우열공이 희사했으며 6세손 일본 거주 필옥(必玉)은 거액을

협찬하는 반면,욋골 종친은 가사에 어려움에도 몸소 협력하여 성사

시켰으니 공사가 끝날 때까지 다함께 협조한 공로와 감사는

후손들에게 길이 귀감이 될 젓이라.』고 하였다.(최양섭)

 

ㅇ 관암대(冠岩臺)

고성군 하이면 사곡에 있는데 농와공 최상억(農窩公崔祥嶷)이 성묘하고

휴식 하던 곳이다.(환여승람)

(주) 최상억(崔祥嶷 20世) :통덕랑공 최흥호의 후이고 최광표공

(崔光表公)의 자

 

ㅇ 구남서실(龜南書室)

산청군 신등면 사정리 구평마을 (山淸郡新等面射亭里龜坪)에 있다.

건재공(健齎公) 최정우(崔正愚)가 제생의 강학하는 곳으로 세웠다.

공산공(恭山公) 송준필(宋浚弼)이 기문(記文)을 지었다.(세헌록)

(주)최정우(崔正愚 24 世) “ 해정공 최수강(崔秀岡)의 후이고

사양공 최규성(崔圭升)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