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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주요인물(主要人物)-2)학,문행(學, 文行)- 담 (潭 10世)-우윤공(右尹公) 담(潭)의 입 고성(入固城) 자취

by choijooly 2024. 5. 6.

우윤공 담(右尹公 潭)및 配位光山盧氏 雙兆

 

8. 주요인물(主要人物)

2)학,문행(學, 文行)

 

 ( 10)


호는 둔암(遯庵)이다.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수학하고 유행으로

덕릉(고려충선왕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공은 김해도호부사공 최윤신의 장자이며

검재공 최수지의 증손이다 8대조 안렴사공 최용생이 그의 곧은 성품때문에 당시

원나라 어향사(御香使)인 주원지테므르(朱元之木兒)에게 거슬림을 받아 고려충정왕2

(1350)에 교체 당하자, 사천(泗川)에 정착한 후부터 자손들이 진주 강주촌(晉州康州村)

함안 안인(咸安安仁)으로 이거하고, 공은 다시 고성으로 옮겨왔다.

손자 의민, 의숙의 훈공으로 한성 우윤(漢城右尹)에 증직 되었다.(환승여람)

 

 우윤공(右尹公) ()의 입 고성(入固城) 자취

 

한성 우윤농 최담(崔潭)은 시조 문성공의 9세손으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유행으로 덕릉참봉에 제수되었다. 공은 김해도호부사공 최윤신(崔潤身)

맏이고 비안 현감공 최수지(崔水智)의 증손이시다.공의 8대조이신 안렴사공 최용생

(崔龍生)이 사천으로 유배 정착한 것이 우리가 경상도에 태어난 계기가 되었으며,

이 후로 현감공 최자경(崔子涇)이 진주 강주촌으로 이거하고 군수공 최이식(崔以湜)

께서 함안 안인으로 옮겼으며 다시 우윤공 최담(崔潭)이 고성 구만으로 옮겨 정착

하게 된 것이다.이후로 후손이 번성하여 국내 굴지의 문벌로 자리 잡았으나

고성으로 옮겨온 연유에 대하여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서 단언 할 수는 없다.

오직 족보에 안렴사공 이후대대로 문과에 굽제하였고 행적과 배위 그리고

묘소는 모두 실전되었다는 기록뿐이니 당시의 주변 사정과 집안의 형편을

추리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공의 증조인 비안현감공 최수지(崔水智)는 임기를 마치고 해평에 정착하여

환향하지않으니 배위인 함평 모씨는 부득이 아들인 군수공 최이식(崔以湜)

함께 친정 곳인함안 안인으로 이거하였으나, 모오사화와 함평 모씨 가문과의

연분 등으로 집안이 어수선하여 이곳에서 다시 고성구만으로 옮겨 왔을

것이라는 추측이다.,여기 무오사화와 함평 모씨와의 관계로

영향을 받았을 연유를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고 같다.

 

첫째, 무오사화와의 연유는 김해도호부사공 최윤신(崔潤身)이 무오사화에 희생된

사림파의 김종직, 어세겸,김일손 등과의 교유 때문에 우리 집안에도 화가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것은 김해도호부사와 배위의 묘소가 실전되고

사적의 기록이 전무함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하겠다.

 

둘째, 함평 모씨와의 인고(姻故)는 비안현감공 최수지(崔水智)의 배위가 세조의

미움을 산 모순(牟恂)의 딸이며, 또 공의 손부 최윤옥공(崔潤屋公)의 배위도

모순(牟恂)의 손녀이기 때문에 모씨 문중 가화에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그 당시 고성 구만 화촌이 노씨 집성촌이었는데 공의 배위가 광주

노씨인지라 처가 곳인 구만으로 오셨는지,그렇잖으면 구만에 오셔서

노씨 가문에 출입하셨는 지는 알수가 없으나 전자의 경우가 맞을 것으로

본다.그렇지 않고는 하필이면 구만으로 옮겨 왔을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기때문이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만으로 이거한 뒤 함안 안인과는

연락을 끊고 살았다고 본다..이는 안렴사공을 비롯하여 최전우(崔田雨),

최택(崔澤), 최사필(崔斯泌) 3 공과 그 배위의 묘소, 그리고 공의 조부 최이식

(崔以湜公),()최윤신공(崔潤身公)의 묘소와 기록이 모두 실전 하였음이

이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공의 장례에 전하여 오는 말을 적어 본다. 공의 장지를 구만 당산마을에 있는 독산에

정하였는데 풍수가 이 자리는 자손은 흥성할 것이나 삼우 날 맏 상주가 운명할 것이라

하니 맏상주(云傑) 나보다 집안의 융성함이 앞선다.”하고 장례를 치루니 과연 삼우

날에 별세 하였다고 한다.그래서 인지 족보에는 맏 상주에 대한 생몰연대의 기록이 없다.

그러나 공은 아들 7형제와 딸 둘을 두고 손자 최균(崔均)과 최강(崔堈) 양공의

훈공으로 한성우윤에 증직되었으며 자손이 오늘처럼 번성하였으니

맏 상주의 살신의종(殺身爲宗)의 보답이라 하겠다.(부산종친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