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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주요인물(主要人物) - 3) 유일(遺逸)[1]

by choijooly 2024. 5. 6.

8. 주요인물(主要人物)

3) 유일(遺逸)

 

벼슬하지 않고 전원에 묻혀 사는 학식높고 품행이 어질고 바른 분

 

ㅇ 하( 10)

 

검재공 최수지(崔水智)의 증손이고 무사공 최윤신(崔潤身)의 자이다.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경사(經史)에 박통(搏通)하고 문장과 절의(節義)

추충(推重) 되었다. 사적이 함안 고성 향안(鄕案)에 실려있다(환여승람.고성지)

 

 ㅇ 거산(巨山 11)

 

자는 이고(而固)이다.공은 훌륭한 바탕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또 가문에서 전해오는 가르침을 받들어서 안으로는 읠에 밝았고

밖으로는 실천에 힘을 써서 명성과 행실이 뚜렷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하여 별시위(別侍衛)로 천거되었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얼마 뒤에 시대의 혼란함을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면서 말하기를

즐거우면 행하고 근심스러우면 피한다는 것은 공자의 말씀이고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가르,침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함안에서 백부인 우윤공 최담(崔潭)을 따라

고성으로 옮겨와서 고성군 동해면 구절산 아래에 집을 정하였는데

문에 둔옹(遯翁)이라는 편액을 걸어 놓고 자취를 숨기고 살았다.(환여승람)

() 최거산ㄴ(崔巨山) : 참봉공 최하의 자

 

 ( 12)

 

자는 극심(克深)이다. 공은 판서공 최득경(崔得涇) 6세 손이며 모산공()

최기필(崔琦弼)의 차자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세가 기울어 거의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학문에 뜻을 두었다. 젊어서는 정한강공 구(鄭寒岡公 逑),

정동계공 온(鄭桐溪公 蘊)등 여러 선생들과 교유하여 황명옥사(皇明屋社)에서

도의를 연마하여 헛되이 보낸 날이 없었는데 덕원강회록(德院講會錄)을 살펴보면

그 대강을 알수 있다.일찍 음사(蔭仕)로 장사랑(將仕浪:  9)을 배수하였으나

인조 24년 갑신(1644)에 명나라가 망하자 대명처사(大明處士)라 자호하고 평생

벼슬하지 않았다.죽당공 최탁(竹塘公崔濯)과 영장공 최혼(營將公崔渾)은 모두

공의 종형제들인데 평소에 가문의 전통에서 배운 의리가 몸에 젖어 있는 것은

속일 수 업ㅂㅅ는 것이다.옛부터 충신과 의사는 소인배들에게 중상모략을 당하여

왔으니 송나라 악비(岳飛)와 우리나라 임경업 장군과 같은 사람이 그러하다.

(환여승람.고성지)

 

광윤(光潤 19)

 

자는 덕원(德源)이고 호는 병옹(炳翁)이며 괴당공(槐堂公) 최시대(崔始大)의 조카이고

최정대공(崔挺大公)의 자이다.

괴당공(槐堂公,始大) 백부에게 학문을 배워 이 학문을 밝게 이끌어서 스스로

법도에 맞게 godg하고 아주 작은 일도 이치를 살렸다.

추세를 구하지 않고 임천(林泉)에서 지취를 감추고 살았다.(환여승람)

 

태규(泰逵 19)

 

자는 여홍(汝鴻)이고 호는 화사(花史)이다.

공은 참봉공 최하(崔河) 9세손이며 동계공(東溪公) 최치두(崔致斗)의 아들이다.

성품은 중후 관대하고 너그러웠으며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독서를 시작하면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잊어버리고 밤을 꼬박 새우는

일이 다반사 였다. 처음에는 오산공 최태진(吾山公崔台鎭)과 경재공 최상순

(絅齋公崔祥純)에게배웠고 장성해서는 문헌공(文憲公) 성재 허전(性齋許傳)

스승으로 섬기며 경학과 의리에 대해 공부하다가 마침내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만년에는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것은 종이 위의 글씨만을 연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날마다 행하는 효제충경(孝悌忠敬)이 진실로

설제적인 일이니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였다

.

 지초와 난초는 캐지 않는다고 무성해 지는 것은 아니며 군자는 세상과

맞지 않는다고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 하니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 그 말을

명언이라고 했다(환여승람)

 

상준(尙濬 20)

 

자는 국현(國鉉)이며 호는 연암(淵庵)이다.

공은 참봉공 최하(崔河0 10세 손이며 화사공 최태규(崔泰逵)의 아들이다.

성품은 효심이 독실하여 부모를 섬길 때 항상 곁에서 모시면서 뜻을 어기지 않았다.

학문에 있어서는 재주가 명미나게 뛰어나고 뜻이 전일하여 6~7살에 벌써

육경을 두루 암송하였으며 과거에 응시항여 한번 만에 발해(發解)하였다.

얾마 뒤에 만성 박치복(晩醒 박치복(朴致馥)과 후산 허유(后山許愈) 등 여러

군자들에게 경서 중에 의문이 나고 어려운 부문을 질문하여 많은 칭찬을 받았다.

뒤에 또 마을에서 뽑혀 진주의 낙육재에서 3년간 거처하면서 스핫하였는데

관찰사인 민형식(()衡植)이 공을 아주 귀하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체직하여 서울로 돌아갈 때 함께 가자고 하였으나 공은 사양하며

따라가지 않았다.물러나서는 산수 간을 소요하면서 후학을 교육하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문사(文詞)와 학업(學業)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증을 받았고 유집이 있으며 행적이 철성지에 실려있다.(환여승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