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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 주요인물(主要人物) - 9) 원종훈(原從勳`-均) [1]

by choijooly 2024. 5. 14.

8. 주요인물(主要人物)

9)원종훈(原從勳) - 1)

 

ㅇ 균 (12 )

자는 여평(汝平)이며 호는 소호(蘇湖)이다. 공은 시조 문성공 최아의

11세손이며 증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인 최운철의 장자이다.

중종 정유(1537)에 고성군 구만면 곤계봉 아래인 소대에서 태어닜다.

풍채와 거동이 엄숙하여 흐트러짐이 없었고 도량과 재간이 넓고 원대

하였으나, 초야에 묻혀 공명을 바라지 아니하고 2~3칸의 집에서 형제와

함께 즐겁게 지냈다. 임진와란이 일어나자 중제 소연공 게(土自)에게

가족을 의령 자굴산중에 피난케 한 후 계제 소계공 강을 비롯하여

종생질 이달. 생질 안신갑 제공과 함께 향병을 모집하니 일순간에

수백명이 모였다. 공은 모주(謀主)가 되어 전략의 수립과 병기의 조달

그리고 군량의 공급을 맡았다. 아우 강은 장수가 되어 잘 훈련된

군사를 이끌고 위급한 곳 부터 달려가 싸웠다. 공은 담티재(고성군

구만면 작동에서 개천면 청광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진을 치고

풍운장(風雲將)” 이라 자칭하고 거짓 군사를 배치하여 적을 막으니

명성과 위세가 더욱 더 퍼져 나갔다

초유사 학봉 김성일이 그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요청하므로 형제분은함께 가서

초유사의 지휘를 받게 되었으며, 대소헌 조종도. 망우당 곽재우.모촌 이정.

송와 강칭. 송암 이노 제공과 더불어 한 마음으로 적을무찌를 것을맹세하였다.

또 권응수. 정세아. 조희익. 신해 등 평소에뜻이 맞는 분들과도강의 좌우에

웅거 합세하였으며, 만약 위급이 있으면서로 알려 병력과군량의 이동에

최선을 다 하였다. 군막에서 여러 가지계략을 세운 것이적중하였으며,

나라가 위험할 때에는 막내 아우()는언제나 혼자싸움터에 나가 크게

공을 세웠는데, 이는 모두가 공의 철저하고치밀한전략에 의하였던것이다.

사량과 웅천 전투에서 충무공 이순신이위급해졌다는 말을 전해듣고 형제가

달려가서 이를 구원하면서 적의목을 벤 수는 헤아릴 수가없었다.

특히 안민령에서 적의 포위를 당하였을때에는 공이 돌을 던져서적이 교란해지는

틈을타서 막내 아우는적을 공격하여 적이 도망가도록 한 큰 공을 세웠는데,

공을 정할 때에는 항상 겸손한 태도로 사양을 하니 사람들은후한(後漢)

풍이 대수장군(馮異大樹將軍)“ 에 비하였다.

 

조정에서 공을 장수가 될 훌륭한 재능이 있음을 알고 수문장에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했다.선조 을사(1605)에는 막내 아우와 함께화공책을 써서 제주앞바다에서

해적을 대파하였는데 호남감사가장계를 올려 통정의 품계에 올랐으며

3등 공훈에 책록되었다.

 

조정이 어지러워져서 나라의 정사가 문란해지고 도덕과 인륜이 무너지는젓을 보고

형제는 모든 것을 떨처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삼형제의 우애가더욱 돈독하여지자

사람들은 공의 집을 가리켜서효우려(孝友廬) 라 하였다.

이 사실들은 고성읍지에 실려있다.

 

공의 충의 덕행으로 국가의 포영(褒榮)이 커서 이조판서와 의민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사림의 숭앙이 지극하여 인조 계해(1623) 구만 소대에

세덕사(世德祠)를 세워 춘추로 향례하다가 정조 신축(1781)에 사림이

공론으로 오도산 아래 구만면 화촌에 도산서원을 건립하여 계씨 이숙공과

병향 하던중 고종 기사(1869)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하였는데, 광복 후

1963년 계묘 3월에 다시 향사 하였다.

 

1984년 갑자에 구만면 광암 곤계봉 아래 도로변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문학박사 진성 이기원이 비문을 지었다. 의민, 의숙 양공의 임란 전적을

기록한 쌍충실기가 국역되어 세상에 널리 반포되었다(환여승람.고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