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 주요인물(主要人物) - 9) 원종훈(原從勳`- 堈)[2]

by choijooly 2024. 5. 14.

8. 주요인물(主要人物)

9)원종훈(原從勳) - 2)

 

ㅇ 강 (12 )

자는 여견(汝堅)이며 호는 소계(蘇溪)이다. 공은 시조 문성공 최아의 11세손이며

증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인 최운철의 3남이다.명종 기미(1559)에고성군 구만면

곤계봉아래인 소대에서 태어났다.몸을 가지는 태도가 간중하고 도량과

재간이 넓고 굳세었으며 효성과우애가 천출로 태어났다.조실부모 하였으므로

백중 두형을 부모같이섬기면서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는 일이 없었다.

읽기에 힘을 써서경서와 사기에도 널리 통달하였으며 시가와 문장에도

뛰어났는데과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붓을 던지고 을유(1585)에무과에서

급제하였다. 이때 주역을 암송하여 시관의 물음에 글의 뜻을응답함이마치 물

흐름과 같았으므로경학이 이와같이 깊은데 무인으로나가는 것은 아까운

일이로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맏형인소호공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 종생질 이달과 생질 안신갑이 의병을거느리고 왔을 때 왜적을 맞아

싸워 물리치니흩어져 도망갔다.5월에 초유사 김성일의 지휘를 받아 김대명.

이달과 합세하여 사천,고성의 적을 격퇴시키고 한편으로 이광악. 이달과 더불어

창원.진해의해적을 협격하였는데, 적은 패하여 밤중에 도주하였다. 8월에 왜적이

진주로 침입하자 판관 김시민과 합세하여 적을 대파하고 적장 평소태를

사로 잡았다.10월에 적이 다시 진주성을 포위하자 공이 조응도. 이달.

정유경 등과 같이 남강변에 장병을 배치하고 밤에는 망진산에 올라 정병들과

횃불을 치켜들어 천지를 진동케 하자 적이 놀라서 도망쳤다.

일찍이 충무공 이순신을 원군하여 사량과 웅천 해전에서 적을 무찔러 대승을

거두었고 충용장군 김덕령이 영남으로 진군해 왔을 때 공의 과감한 무용을

알고 별장(別將)으로 삼았으므로 군세가 크게 떨쳤다. 처음 훈련봉사에

제수되었다가 도총경력을 거쳐 가리포첨사로 나왔을 때, 1605년 선조 38

5월 해적이 쳐들어온다는 경보가 매우 급하니 이 때 맏형의 화공책을써서

수백척의 적선을 순식간에 불태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 대첩의 보고를 조정에서 받자 임끔께서 칭찬하시는 포상유지(褒賞諭旨)

특별히 내리고 1등 공신으로 책록하여 순천부사에 배명되었다.

 

그 후 병오(1606)에 경상좌도수사로 승진(1606년 선조 397)되어 돌아

오는 길에 순천 관속들이 행차를 멈추게 하여 말안장과 그림잔 한 쌍을 올렸으나

이를 받아드리지 아니하고, 또한 관속들이 사사로이 입은 은혜로 포백을 몰래

함께 가는 인편에 부쳤으나 중도에서 그 사실을 알고는 모두 되돌려 보냈다.

전에 부총관이었을 때 장복(章服)을 항상 빌려 입는 것을 보고 도총관

서성이 그 청백한 절개에 감복하여 임금께서크게 탄복하시고 비단 1단을

하사하자,사람들이 모두 옛날 입을 옷이 없던 제준(祭遵)의 행덕에 비하였다.

광해군 때 비국(備局)에 천입되어 병사(兵使)의 물망에 수위로 올랐으나

뇌물을 주어야 발탁이 된다는 귀띔에뇌물로 벼슬을 살 수는 없다.”

하자 교동별장으로 내쫓으면서 임해군을 살해하도록 영()을 내렸다.

그러나 내 비록 죽을지 언정 무고한 왕자를 차마 해칠 수는 없다.”라고

하였더니 광해군이 이것이 옳다고 하여 충청도 수사로 배명하자.

신병을 구실로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다시 포도대장으로 부름이 있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이 사실이 중흥지,동국명장록과 제현문집에 실려있다. 맏형과 함께

구만면 화촌 도산서원에 병향하며 1984년 갑자에 구만면 광암 도로변에

신도비를 세웠는데,문학박사 진성 이기원이 비문을 지었다.의민, 의숙

양공의 임란전적을 기록한 쌍충실기가 국역되어 널리 반포되었다.

완도에는 가리포 해전 대첩비. 진주 남강 변과 대구시 두류공원에 전적비,

부산 사직공원 내에는 유허비가 서 있다.(고성지. 환여승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