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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덕총람(世德叢覽)

주요인물(主要人物)-13)인물:杜烈 22世-正烈- 翰升23世-圭升-[25]

by choijooly 2024. 5. 23.

8. 주요인물(主要人物)

13)인 물(人物)-[25]

 

ㅇ두열(杜烈 22世)

자는 상대(相大)이고 호는 청암(淸巖)이다.참봉공 최하의 후이고 국헌공 최태경

(崔泰敬)의 의 증손이며 동포공 최병식(崔秉湜)의 아들이다.가난한 잡안에서

태어났으나 성품이 강정(剛正)하고 인화(人和)가 돈독하여 고학(苦學)으로

중.고교와 서울대 법대까지 좋업하였다. 고등고시 사법 행정 양과에 합격하여

천재라는 평판이 자자하였다.

경찰에 출사(出仕)하여 치안국장을 거쳐 부산직활시장으로 부임하여 동구 좌천동

도로화강 및 대연동을 비롯한 남구 개발에 첫 삽을 들었다. 이후 노동청장으로

전임(轉任)하여 노동정책의 일환인 근로조건 개선으로 기업운영에

공헌한 바 지대하였다.(족보)

 

ㅇ정열(正烈 22世)

보명(譜名)은 황열(晃烈)이며 위풍당당하고 품위가 묵중하여 매사에 능통하고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였다. 일찍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거류민단 재정위원회

부위원장과 나고야시 위원장을 지내고 5공화국 때 근대화에 기여한 공이 지대하여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두양초등하교 건립부지 확보와 옥종면 경찰 파출소를 건립하는 등 지역개발에

공헌한 바 크고 도남재(道南齋)의 준공과 귤하재 및 내현재 건립에도 2/3 를

출연하여 종사에도 큰 공헌을 하였기에 도남재 경내에 공덕비가 세워졌다.

(주)최정렬(崔正烈):모산공 최기필의 후이고 귤하공 최식민(崔植民)의 증손


ㅇ한승(翰升 23世)

일 휘는 규한(圭翰)이며 자는 창가(昌可)요 호는 경산(景山)인데 해정공 최수강의

후로 정언공 최규승(崔圭升)의 아우이다.재예가 뛰어나고 문사(文詞)에 능했으며

일찍 세속을 벗어 난 현인(賢人)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벼슬은 용양위 부사직에 오르고 문집이 있다.(고성지)

 

ㅇ규승(圭升 23世)

호는 사양(泗陽)이다. 공은 해정공(海亭公) 최수강(崔秀岡)의 10세손이고

처명대공(崔鳴大公)의 5세손이며 오산공(吾山公) 최태진(崔台鎭)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터 몸집이 커서 거인과 같아 동년배들은 그의 지휘를 귀담아 들었다.

선천적으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어른들도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악관의 나이임에도 권세와 부귀함을 배척하였다.

하루는 처가에 축문을 읽으러 가 사위가 거처하는 방에 있었는데 장인 어른이

은수저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학문은 경전에 능통하였으며 깊은 뜻을 연구해

밝혔다. 그리고 제자서(諸子書)와 역사서(歷史書)를 두루 섭렵하였는데,이는

학문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일찍 성균관시, 남성시를 보러갔는데 자기 당인이 아니라고 지목받아 배척을

당하였으나 시험을 주관하던 감독관이 그의 시험지를 뽑아 임금에게 제출하였다.

1872년 임신에 태학에 들어가 임금에게 강론하고 임금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짓는데 참여하여 사부수권(四部手圈)의 물망에 오르자 공은 근심하며 불안해

하였다.1888년 무자 봄이 되어서야 처음 관리가 되었고 5월에 실천(實薦)에

참여 하였다.1889년 기축에 전적(典籍:정6품관)에 올라 정언(正言)으로 제수

받고 1891년 신묘에 비로소 조정에 돌아 왔는데, 화의(和議)만 볼 뿐 들은 척

하지 않다가 서양 사람들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독립시(獨立詩)를 지어

그의 의지를 드러냈다.

처울에 있던 옛 동료들이 편지를 보내어 출사할 것을 권유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못 들은 척 하였으며 장조(莊祖)의 제사 일에 상소를 올려 정종(正宗)을 정조(正祖)

라는 존호를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1907년 정미 가을에 각지에 흩어졌던 선영들의 묘소를 살피고 10월에 집에

돌아와11월 11일 별세하니 향년 67이였다.

실기 3권이 있다.(고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