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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덕총람(世德叢覽)

주요인물(主要人物)-13)인물-泰淳23世-致淳-養燮 -道淳-圭璟23世 [26]

by choijooly 2024. 5. 23.

8. 주요인물(主要人物)

13)인 물(人物)-[26]

 

ㅇ태순(泰淳 23世)

자는 순약(舜若)이며 호는 매사(梅史) 또는 근암(謹菴)이다.공은 통덕랑공

최흥호(崔興虎)의 10세 손이며 최윤전공(崔奫鎭公)의 아들이다.

공은 어려서 부터 행실이 단정하였고 경전을 익히고 글을 지음에 막힘이 없었으며

집안에 거처할 때에는 항상 자식으로서 허물이 없었다.

1869년 고종 기사에 향시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회시(會試)를 보려고 서울에

머무는데, 갑자기 마음이 움직여 급히 짐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께서

병이 들었다가 조금 뒤에 돌아가셨다. 1876년 병자에 또 부친상을 당했다.

상례를 다 마치고는 문을 닫아 걸고 과거를 포기하고 오로지 옛 선현의 학문을

배우고 뜻을 구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일찍 삼가현의 황매산(黃梅山) 아레에 살때

후산 허유(后山許愈),매서 한진행(梅西韓鎭行),사양공 최규승(泗陽公崔圭升)들과

도의를 연마하여 바탕이 더욱 넓어졌다. 돌아와서는 임연정(臨淵亭)을 지어 꽃과

나무를 심어 놓고는 세상의 일을 전혀 끊고 돌보지 않았다.

 

오로지 날마다 성현의 책을 옆에 끼고 읽고 생각하였으며 틈이 나면 족형인 서비공

(西鼻公) 최우순(崔宇淳)을 맞이하여 즐겁게 시를 읊조리며 지조를 굳게 지키고

지냈다. 1876년 병자에 유행과 덕망이 있어 만년에 행의로서 영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임연정에서 여생을 보냈다. 1910년 경술에 병이 오래

끌어 낫지 않고 위중하자 스스로 만시(挽詩)를 지어 놓고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ㅇ치순(致淳 23世)

자는 대중(大仲)이고 고(考)는 최엽진(崔燁鎭) 공이다. 통영시 민정동에서 남해군

상동면 봉화리로 이거하여 후손들이 오늘까지 세거하고 있으며 봉화리 앞 묘소에는

가선대부 행 훈련주부 최공지묘(嘉善大夫行訓練主簿崔公之墓)라 새겨진

묘비가 있다. 공의 증손인 치환(致煥)공은 국회의원 5선의 영예를 안았다.

(현지확인)

 

ㅇ양섭(養燮 23世)

일 휘는 판섭(判燮)이며 자는 언함(彦涵)이고 호는 중암(重菴)이다.

천품이 인후하고 재주와 자질이 재빠르고 슬기로워서 들은 것은 잊지않고 한번

본 것은 번번이 기록하였으며 청빈하여 학구에 전념하지 못했으나 틈 날때마다

글을 탐독하여 끝내 유림 수장(秀長)이 되었으니 장갈문(狀喝文)을 청하는 발길이

문 앞에 끊이지 안았다. 말은 느렸으나 침착 의연하여 그 뜻에 꺽임이 없었으며

추모재(追慕齋)의 집을 짓고 유고가 있다.(향교지)

(주)최양섭(崔養燮): 칠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청계공 최익열(崔翼烈)의 자

 

ㅇ도순(道淳 23世)

자는 원가(元可)이다. 12살에 아버지를 여위자 집안 안팍을 다스리는 어머니에게

대신할 것을 청하였으나 "집안 일 때문에 배움을 잃는다면 어떻게 입신양명을

할 수 있겠는가? 너는 부지런히 공부하여 집안의 명성을 잇도록 하여라."는

말씀을 듣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성품은 온화하고 너그러웠으며 남들과 다투는

일이 없었고 몸가짐이 엄격하였다.편모 섬김에 어김이 없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초상 절차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며 슬픔이 정도를 지나칠 정도였다.

평생을 한결같은 자세로 근본을 돈독히 하고 덕을 숭상하였다.(세헌록)

(주)최도순(崔道淳): 해정공 최수강의 후이고 홍와공 최필형(崔必衡)공의 손

 

ㅇ규경(圭璟 23世)

자는 한선(漢善)이며 호는 송고(松皐)이다. 어려서 부터 어버이 섬김이 지극하여

부모에게 날마다 기거(起居)를 묻고 밋있는 음식으로 부모 섬김에언제나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는데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

어머니 병이 위독하자 깊이 걱정하며 대소변과 약탕을 몸소 맡아 다스리고 하나도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않았으며, 모상을 당하여 슬퍼하기를 예에 지나치고 장례

절차에 어김이 없었다. 부상을 당했어도 모든 예절이 모상때와 같았으며 제사때에는'

목욕재계하고 제수, 제기를 친히 점검하여 정결케 하여 남매간의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니 일문이 화목하였다.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뇌물이 오고 가는 것을 보고

이는 군자의 할 바 아니라 하고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광무경인(1890)에 사헌부 감찰의 직함을 받아 통훈의 품계에 올랐으나 글 읽기에

힘쓰며 치가(治家)로서 정사(政事)로 삼았다. 항상 자제들에게 배우기를 권장하면서

평생에 마음을 세우기를 평평하고 곧은데 일임(一任)하여 자기를 행하고 남을 대함에

법도를 일삼지 않고 규각(圭角)을 들내지 아니하여 시종토록 변함이 없으니, 사람마다

공경하고 복종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당산마을 약산재(藥山齋) 억내에 사적비가

ㅇ딨으며 양천인 경파 허채(耕坡許採)가 비문을 지었다.(농호공 문중 가첩)

((주)최규경(崔圭璟): 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농호공최상석(崔祥錫)의증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