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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덕총람(世德叢覽)

주요인물(主要人物)-13)인물-東鎭22世-秀基-鼎鎭-商烈-成烈-台鎭-璟烈 22世 [24]

by choijooly 2024. 5. 23.

 

8. 주요인물(主要人物)

13)인 물(人物)-[24]

 

ㅇ동진(東鎭 22世) 

자는 형선(亨善)이고 보명은 갑렬(甲烈)이다. 타고난 성품이 청직(淸直)하고

몸가짐이 단아(端雅)하며 효성이 출천(出天)하고 문 행이 겸비하여 칙명(勅命)으로

비서승(秘書丞)으로 관직이 내리니 식견있는 사람들이 매우 칭찬하였다.(향교지)

(주)최동진(崔東鎭): 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최광욱공(崔光郁公)의 증손

 

ㅇ수기(秀基 22世)

자는 덕윤(德潤)이고 송정공 최응룡(崔應龍)의 후이고 최운형(崔雲亨)공의 증손이다.

흉년이 들자 사재를 털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엿다. 고을 사람들이 보의비(報義碑)란

제호의 송덕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에는 " 마을에 10여 호가 굶주리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어진 노고를 베푸니 그 아름다운 이름은 백세에 전하리라." 하였다.

(해평파보)

 

ㅇ정진(鼎鎭 22世)

자는 관부(寬夫)이고 호는 화산(花山)이다. 문학과 행의로 스스로를 지키고

평생을 임천(林泉)에서 후학들을 더욱 돈독히 이끌었으며 가훈(家訓) 3 권이 있다.

(향교지)

(주)최정진(崔鼎鎭): 통덕랑공 최흥호의 후이고 만회공 최필구(崔必龜)의 자

 

ㅇ상렬(商烈 22世)

일 휘는 동보(東普)이고 자는 태형(泰亨)이며 호는 가은(可隱)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지론이 정당하였으며 행의에 조금도 어긋나거나 굽히는 일이

없었고 조신하는 데는 법도가 있어 향인들로 부터 추앙되어쑈다.

또 종사에 전념하여 대 종중 재산 확인과 관리에 힘써서 재산 목록을 족보에

등재하였고 족보 수찬에 성력을 다하여 문중의 존경과 칭송이 높았다.(족보)

(주)최상렬(崔商烈):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평와공 최상가(崔祥可)의 손의 자

ㅇ성렬(成烈 22世)

일 휘는 규진(圭鎭)이고 자는 성칠(聖七)이며 호는 백서(栢棲)이다.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부모 봉양하는 일 역시 자신의 직분으로

생각하였다. 공은 바른 생각과 겸손한 품행으로 매사를 주도 면밀하게 하고

신중하게 처리 하였으며 도리와 의(義)를 중시 하였다.

자식들을 교육할 때는 언제나 성현들의 가르침으로 깨우쳐 주고 격려하였으며

책을 통한 수양을 강조하였다. 공의 아들들이 공을 위하여 백운정(白雲亭)을 세웠다가

심재 조긍섭(曺兢燮) 선생의 권유로 뒷산 기슭으로 옮겨 소완정(小宛亭)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헌록)

(주)최성렬(崔成烈):찰방공 최진홍의 후이고 만회공 최즙(崔濈)의 8세손이며

무우재공 최지대(崔至大)의 현손

 

ㅇ태진(台鎭 22世)

자가 응천(應天)이며 호는 오산(吾山)이다.공은 해정공 최수강(崔秀岡)의 9세손이고

은재공 최명대(崔鳴大)의 현손이며 눌건와공 최필태(崔必泰)의 아들이다.

장성해서는 정재 류치명(柳致明)선생을 따라 심성(心性)과 이기(理氣) 사례(四禮)와

상변례(常變禮)등을 배웠는데 의심나는 것을 하나하나 여쭈어 스승에게서 답을

얻으면 그 답을 기록해 두었다.

1735년 을묘에 정재선생이 전례(典禮)문제로 상소되어 호남에 있는 지도(智島)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공은 1000리길을 몸소 스승을 모시면서 곤궁함과

위험함을 피하지 않았다. 매 사계절의 중월(仲月)(2.5.8.11월)이면 강회(講會)를

열었는데 이것이 규칙이 되어 훗날까지 계속해서 행해지게 되었다. 일찍이

팔경휘군(八經彙裙), 심성설(心性說),태극변의(太極辯疑),동현록(東賢錄)등을 지어

자신을 살펴보는 바탕을 삼았다.(향교지)

(주)최태진(崔台鎭):해정공 최수강의 후이고 만회오공 최광삼(崔光參)의 증손

 

ㅇ경열(璟烈 22世)

자는 덕보(德甫)이고 호는 소정(小亭)이다. 어릴때부터 남다른 재질이 있고 총명하여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선친은 공의 학문적 성공을 기대하며 유학을 보내어

스승을 따르고 벗을 사귀게 하였다. 공은 세상이 돌아가는 추이를 관망하며

한학 중심의 사회가 아님을 간파하고 구 학문을 떠나 신학문을 배웠다. 신학문을

성취한 뒤에 북청교관(北靑敎官)통영훈도(統營訓導)를 거쳐 사천군수에 올랐으나

요직에 있던 사람들로 부터 모함을 당해 부임하지 못하고 말았다.(세헌록)

(주)최경렬(崔璟烈):해정공 최수강의 후이고 농와공 최상금(崔祥嶔)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