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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9. 효. 열부(孝. 烈婦)-3)정렬(貞烈)[5]- 李氏- 李氏-李氏-李氏,金氏 雙節

by choijooly 2024. 6. 1.

 

9. 효.열부(孝.烈婦)

3)정렬(貞烈)[5]

 

ㅇ 이씨(李氏)

본관은 제령 모은 이오(茅隱李午)의 후이고 최요진공(崔堯鎭公)의 처이다.

남편이 죽자 6일만에 유복자 아들을 낳아 3년을 양육하면서 시부모를 극진히

섬겨 어린아이로 하여금 정을 붙여,평상시와 같았으나 대상일(大祥日)에

장롱속의 옷을 내어 3벌을 끼어 입고 어린 아이에게 집안의 명예를

보존토록 유서를 남겼다. 고성군 구만면 광덕리 도로변에

동서 진양하씨(崔翰鎭의처)와의 열행을 표하는 쌍열비가 있다.

(고성지. 환여승람.고성문화 유적지)

(주) 최효진(崔堯鎭 22世)톹덕랑공 최흥호의 후이고 최필암공(崔必嵓公)의 자

본관은 제령 모은 이오(茅隱李午)의 후이고 최요진공(崔堯鎭公)의 처이다.

 

ㅇ 이씨(李氏)

본관은 벽전이며,사인(士人) 이승효(李承斅)의 딸이고사인(士人) 전주 최동태공

(崔東泰公)의아내이다.효성으로시부모를 섬기더니남편이 병들매 혈지(血指)를

입에 대었으나 효력이 없었다..이에 칼을 꽃아 자절(自節)코자 하다가 좌우의

금집(禁執)을 당하니드디어 손수 송종(送終)의 의금(衣衾)을 재단하여

유감 됨이 없게 하였다.그는 멀리 칼날을 이미가렸던 것이니

밤에 침실에 들어가서 시집 올때의의복을 입고 독을 마셨다.

따로 유서를 써서 광주레에 두었는데동서들에게 시부모를 잘 봉양할 것을

부탁하고 어린 아이에게 부업(父業)을바꾸지 말것을 경계하였다.

가인(家人)이 합장하였드니 이한주진상(李寒洲震相)과박만성 치복(朴晩醒致馥)등

제공 수백 명이 포상해 주도록 여러번 진정하였으나얼사(臬司:감사)가

들어 주지 아니하였다.(진양속지)

(주)최동태(崔東泰 22世): 찰방공 최진호(崔振虎)의 9세 손이고 최싱잡(崔祥甲)의 손

 

ㅇ 이씨(李氏)

본관은 재령이고 이효광(李孝光)의 여이며 제학(提學) 이맹현(李孟賢)의

후로 전주인최하열공(崔夏烈)의 처이다씨는 편이

이씨는 남편이 뜻하지 않은 와병으로 일어나지 못한 채 13살.9살.7살.

4살의 어린 2남 2녀를 두고세상을 떠나버리니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이었다.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에ㅡ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여 마음을

고쳐먹고 낮에는 들에서 농사일을,밤에는 방직(紡織)으로 가계를

이어가는 고된 생활의 연속이 었다.그러나 어린 자녀들에게는 엄한 교육으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도록 하였으며 가솔들에겐는 엄한 법도로 가규(家規)를

시행하여 남으로부터 상배(喪配)의 편견을 갖지 못하게 하였다.

열부의 정성에 하늘도 무심치 않아 4 남매가 올바르게 자라서

모두 좋은 혼처 가려 성혼하니손세도 번성하고 가세도융성해져서

사람들이 최씨 가문의 중흥조가 되었다고 칭송하였다.

(주)최하열(崔夏烈 22世): 일 휘는 동화(東華)이고 자는 태윤(泰允)이며

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평와공 최상가(崔祥可)의 손

 

ㅇ 이씨, 김씨 쌍절(李氏,金氏 雙節)

이씨는 고성인 이기주(李基周)의 딸이고 전주인 최달용공(崔達龍公21世)

의 처이다. 김씨는 김해인 김종관(金鍾寬)의 딸이고 최달룡공의 아우인

최달성공(崔達城公)의 처이다

달룡, 달성 형제가 소년으로 병이 깊어지자 이씨와 김씨는 함께 단지하여

수일의 명을 연장하였는데 상을 당하자 두 부인은 처음 순종(殉從)함을

결의하였다가, 그 후 내가 죽으면 가사를 부탁할 바 없고 또 남편의

후사가없음을 생각하여 슬픔을 억누르고 장례를 예에 따라 치루었다.

이 후 늙은 시모를 위로하여 봉양하고 어린 아이를 기루면서 그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가정이 본디 빈약하여 조석을 잇기 어려워서

자신의 품삯으로 그 생활을 견지 하였으며, 또 그 여유를 저축하여

전택(田宅)을 이루었으니 그 신고(辛苦)함은 비 할바 없고 근민(勤敏)

하였음이 이와 같았다. 이씨는 1 년후그 종자(從子)인 최실렬공

(崔實烈公)을 양자하여 님편 뒤를 이었고 , 김씨는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최주봉공(崔周奉公)이다. 고을 사림(士林)이 모두 칭찬하였으며

두 부인의 사적이 선후로 발견되었고 김씨의 아들 주봉(周奉:족보명은

柄烈)이 또한 어머님을 섬김에 지극한 효로 들 났다(고성문화유적지)

(주)최달룡.최달성(崔達龍 21世.崔達成 21世)참봉공 최하의 후이고

최태수공(崔泰峀工)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