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9. 효. 열부(孝. 烈婦)-3)정렬(貞烈)[6]- 鄭氏- 鄭氏-鄭氏-諸氏

by choijooly 2024. 6. 3.

9. 효.열부(孝.烈婦)

3)정렬(貞烈)[6]

 

ㅇ 정씨(鄭氏)

본관은 진양이며 공대공(共戴公) 척(陟)의 후이고부사용(副司勇) 일양(一陽)의 딸이다.

17살에 전주 최용호공(崔龍鎬公)과 성혼하였으나 남편이 숙질(宿疾)이 있어 곧 병상에

눕자 정씨를 친가에 보내어 2년이 경과한 뒤에 남편이 죽으니 부상(夫喪)으로 통곡하며

절명에 이른지 여러번이었다. 그러나 집안 사람들이 보호하여 깨우쳐 잘례한 후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시부모가 있으며 부제(夫弟) 3남매가 모두 어려서 위탁할 바 없고,

또 남편의 후사가 없음을 두려워하여 이에 애통함을 참고 가정을 다스려 나갔다.

가세가 빈약하여 방직을 일삼아 생계를 보장하며 들불을 벗삼아 밤을 새웠다.

마침 부제(夫弟)인 최구호공(崔龜鎬公)의 자 락서(洛瑞)를 후사로 삼아 공부릏 하게

하여 그 성취함과높은 관직에 이르게 하였다. 이처럼 정씨의 사실이 타인의 수절함에

비하여 더욱어려움으로 향중의 인사들이 공론을 통하여 표창한 법이 있었다.

1978년무오에 별세하니 향년 86세이다. 종족의 합의로 사적을 기록하여 후세인

들에게 영세 불망토록 돌에 새겨 효열 쌍전(孝烈雙全)하고 극보문호(克保門戶)하여

구지(舊지)에 종당(宗黨)이 사적비를 세웠다(고성문호유적지)

 (주)최용호(崔龍鎬):찰방공최진호의 11세 손이고 최광억공(崔光億公)의 5세 손

 

ㅇ 정씨(鄭氏)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최의병공(崔懿秉公)의 처이다. 정씨는 인품이 높아 얌전하고

점잖아서 일찍부터 규밤(閨範)이 들어났다. 남편이 병이들자 하늘에 빌고 손가락을

깨어 피를 입에 넣었으나 효험없이 죽으니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집안사람들이

미리 알고 막고 지켜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성으로 시부모를봉야ㅇ하면서 슬퍼하거나 탄식하는 빛이 없었다 그 동안 10년을

친정ㅇ[ 가지 않자 친정 큰오빠가 그의 뜻을 바꾸어 먹고 개가시키려는 생각으로

다녀가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어느날 밤, 병도 없이 독을 마시고 순절하니

사람들이 모두감복하고 슬퍼하지않는 사람이 없었다.(진양지)

(주)최의병(崔懿秉 21世) : 모산공 최기필(崔琦弼 )의 10세 손

(주)연일정씨(延日鄭氏):정택화(鄭宅和)의 딸이고 주영(周永)의 손

 

ㅇ 정씨(鄭氏)

진양인 정도균(鄭道均)의 딸로 전주인 최영욱공(崔榮彧公)의처이다.

17살에 시집와서 시부모를 공경하고 섬겼는데 문안하고 음식 봉양에 조금도

소홀한 점이없었다. 시집온 7년만에 남편이 병이들자 밤낮으로 병치료와

약쓰기에 온 정성을 다하여 목욕재계하고 자신이대신하기를 하늘에 빌었다.

남편이 기절하면 손각락을 찍어 피를 입에 넣어주어 수차례 소생시켰으나

끝내 죽고말았다. 정씨는 자결하려 하였으나 남편의혈육이 뱃속에 있으니

대를 잇게 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여 눈물을 머금고 참아냈다.

태아가 사간되자 탄식하고 죽기를 결심하였으나 시부모가 크게놀라 통곡하면서

"아들이 죽었는데 너 또한 죽으면 나는 누구를 믿고 살겠는가?" 하니 정씨는

이에 정신을 차리고 쓰러진 집안을다시 일으키기를결심하고 더욱 독실히게

효도하면서 가사일을 돌보아 시부모를 편안케 하였다.

시부모가 별세하자예를 갗춰 장사지내고 규백(圭柏)을 후사로 삼았다.그러나

불행이도 전사하였음으로 성호(性怙)를 다시 계손(系孫)으로 하였다.

향리에서 효열비를세웠고 효열비문은 하우선(河禹善)이 지었다.(옥종면지)

(주)최영욱(崔榮彧 22世):현감공 최호(崔扈)의후이고 최성민(崔聖民)공의증손 

 

ㅇ 제씨(諸氏)

최진호 공(崔振虎公)의 처인데 임진왜란 때 순절하였다.

자녀가 없다.(환여승람. 고성지)

(주)젰는 본관이 칠원이며 증 참판 제호(諸灝)의 녀

(주)최진호(崔振虎 13世):소호공 최균(崔均)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