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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 주요인물(主要人物 - 11) 명환(名宦)- 응룡(應龍 9世) - [1]

by choijooly 2024. 5. 16.

8. 주요인물(主要人物)

11) 명환(名宦) - (1)

 

ㅇ응룡(應龍 9世)

자는 현숙(見叔)이며 호는 송정(松亭)이다. 공은 검재공 최수지(崔水智)의

손이며 증 참판공 최이한(崔以漢)의 4자이다. 공은 태산과 같은 기상이 있었

으며 일찍 박송당(朴松堂) 문하에서 수학하고 퇴계선생 문하에서 학업을 마치니,

근학능문(勤學能文)으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실려있다.

24실에 생원과 진사에 수석합격하고 30살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곧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는데 문경현감을 원하였음은 부친을 봉양하기

위했던 것이다. 곧 평해군수가 되었고 그 후 사헌부 지평을 거쳐 시강원

필선(弼善:정4품)이 었다가 의주목사(정3품)로 승진하였다.

곧 승정원 승지로 입궐하였다가 광주목사와 진주목사 등으로 옮겼다.

진주목사 재임 때는 증조이신 현감공 (子涇) 묘에 비를 세우고 증조비 진양

정의 묘를 찾아 묘 갈문을 지었다. 전일 안동부사 당시에 명성이 후일에

크게 들러나자 칙령으로 가선대부의 관직 품위를 내렸다.

충청도와 전라도 감사를 거쳐서 형조참판으로 배수하였다가 개성유수

(2품관)로 전임 되었다. 뒤에 한성우윤(종2품)재직 중 서울에서 별세하니

왕이 부문(訃文)을 접하고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케 하고 보호하라 하였다.

(진양지)

 

왕은 사제문(賜祭文)애서 공이 나라에 한 기둥으로서 훌륭하게 내외 요직을

감당하였으며 특히 지방장관으로서의 치적은 오레 빛날 것이라 하고 장차

나라의 더 큰 일을 맡길려고 하였는데 애석하다 하였다.

공은 천성자질이 풍후하고 예의범절이 엄숙하였으며 특히 학행이 높은 박공운

(朴公雲)과 강원감사 김취문(金就文)과는 사우지간으로 덕을 닦고 학문을 높이는데

서로 도움이 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도 무예를 습득하였고 만물을 토론하고

매사를 추진하니 모두가 주도적으로 일 할 수 있는 인재로 추앙하였다

.

공에 대하여 박사 정도복(鄭稻服)은 거조(擧措)에 정신이 맑고 부지란하다 하였고,

조남명(曺南冥)선생은 대기(大器)라 하였으며, 이퇴계(李退溪)선생은 한번 독서를

시작하면 그칠줄 모른다 하였다. 저택이나 임소(任所)에서는 항상 빈객이 만당하고 종일

술을 들어도 취기를 나타내는 일이없었다. 평상시에는 늘 정장하고 단정하게 좌정하여

사물을 대할 때 한번도 심신이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마도 공의 학문이 경(敬)에 기본을

두고 성(誠)에 따믈이었으리라. 충청감사 재임시 교상(轎上)에서 중용(中庸)을 묵송

(黙誦)하니 세인이 평일에도 호학(好學)의 두터움을 가히 알겠다 하였다. 그러나

이따금 공과 대좌할 때 공은 혈육에 대한 고민으로 안색이 편치 않을 때가 있었다.

왕이 이를 살피어 공의 만녀소생(晩年所生)인 홍검(弘儉)으로 하여금 승적(承嫡)케

하니 공의 만경(蔓慶)의 복은 유감이 없다 하겠다. 홍검은 능히 세업을 이었으며

여타는 아직 어리다. 공히 향년 67살로 졸하니 공의 연세가 부수(不壽0라 할 수 없고

옥관자 금관자를 다 하였으니 그 귀(貴)가 불극(不極)이라 할 수 없으며 공의 덕이

두텁고 기국(器局)이 광대하니 능히 삼두(三斗)의 독한 술로 처리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공이 재상이 되었드라면 학문의 깊은 뜻에 따라 침착하고 느긋하게

매사를 다루었을 것이다 라고 칭송하였다.(비문)

 

**송강선생(松亭先生)의 군신(君臣) 문답

-- 왕의 하문( 王의 下問 )

 

자고로 임금은 치안(治安)을 원하지 않음이 아니었으나 마침내 위망(危亡)에

이르고 군자(君子)를 등용하기를 바라지 않음이 아니었으나 소인(小人)들에게

말려들어 갔으니 그 까닰은 무엇인가 ?

저 높은 스승에게 배운 뛰어난 유자(儒者)는 학문을 닦고 이치를 탐구하여 치란(治亂)

의 기틀을 살피고 君子의 길과 小人의 길을 밝혀야 하거늘 그러지 못하고 설치고

날뛰는 小人들에게 늘 몰리고 조정을 떠나지 못하는 것을 늘 근심하기만 햐였으니

이는 또한 무슨 까닭인가 ?

학문을 닦고 진리를 탐구함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이끌어 가는 것을 기본으로

삼기 위해서 학문의 길은 무엇이 앞서야 하는 것이며 정치를 하는 방향으로 무엇이

절실한가 ?

군자로 하여금 기꺼이 이렇게 하도록 등용하고 小人들에게 현혹되지 않게끔 하는데

무슨 방도가 없을 까 ? 경세(經世)를 궁리하고 君子를 치용(治用)하는 것은

참으로 대사(大事)라 하겠다. 깊은 포부와 경륜을 펼쳐내어 이를 한편의 글로써

저술하면 여(子)가 장차 이를 살펴 보겠노라.

 

-(先生의 上答)은 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