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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 주요인물(主要人物 - 10) 충의(忠義)- 정주(正周)-관호(觀浩)-낙종(洛鍾) [6]

by choijooly 2024. 5. 16.

8. 주요인물(主要人物)

10)충 의(忠義)- (6)

ㅇ정주(正周)-24)

자는 영부(永夫)이며 통덕랑이다.강직한 기상이 있어 해야할 일에 용감하였다.

공은 혜정공 최수강(崔秀岡)의 후이고 사양공 최규승(崔圭升)의 막내 아들로

충의(忠義) 최정원(崔正元)공의 막내 아우이다.

공은 기미년 3월 중순 국천사장(菊川沙場)에 집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참가하였다. 넷째 형 정원공(正元公), 최낙희, 최낙종, 허재기 제공과 함께

회화면 동지들과 합류하기로 하고 대대적인 시위로 만세를 부르면서 배둔

장터로 행하였다. 도중에서 일본 헌병의 재ㅔ지를 받았으나 군중은 용감하게

차단선을 뜷고 배둔 장터에 당도하였다.

일본 헌병들이 총을 쏘며 추격하자 공은 갓끈을 고쳐메고 맨 앞에 서서 가슴을

열어 보이며 나를 쏘아라.” 라고 외쳤다. 그러자 헌병들은 스스로 물러나

감히 공의 의지를 꺽지 못하였다. 그 후로 외딴 섬으로 망명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여생을 마감하였다.(세헌록)

 

ㅇ 관호(觀浩 24)

자는 경해(景海)이고 호는 운파(雲坡)이다. 공은 만주 하얼빈에서 만몽일보

(滿蒙日報) 사장으로 있으면서 동포여 ! 각성하라.” 라는 사설을 계제하여

으리 민족의 긍지를 드높였던바 이로 인하여 신의주 경찰서에 피검되어

그 후로 자택에서 연금을 당하였다. 1942년에는 건국동맹에 가입하였다가

194586일에 왜관 경찰서에 피검되기도 한 독립운동가였다.

(족보, 최윤호)

()최관호(崔觀浩) : 낙남공 최산휘(崔山輝)의 후이고 소와공 최진규(崔晉奎)

공의 5세손

ㅇ 낙종(洛鍾 25)

 

공의 자는 주범(周範)이며 호는 창암(蒼巖)이다. 공은 찰방공 최진호의

12세 손이고 영모재공 최진추의 9세 손이며 우암공 최원모(愚庵公崔袁模)

아들이다. 1919년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석하려고 상경하였다가

3.1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선언문을 몸에 지니고 향리로 돌아와

뜻을 같이 하는 애국동지에게 서울의 정세를 자세히 알리고 구만(九萬)에서도

독립만세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어서 면사무소에서 독립운동만세에 궐기할

격문을 등사하여 면내 각 부락과 인근 개천면, 마암면, 영오면, 회화면의

각 부락에도 격문을 돌려서 민중의 참거(參擧)를 유도하였다.

드디어 1919319일 거사 당일 최석호공(崔石鎬公)의 나팔소리를

신호로 수많은 군중이 국천사장(菊川沙場)에 집결하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태극기를 날리며 시위 대오는 배둔 장터를 시위하여

조국독립의 절규를 과시 하였다.

 

이튿날 일본 경찰은 이 민족거사의 주도자들을 잡아들이려는 검거선풍이

불자 주도자의 한 사람인 공은 서울로 피신하였다.

서울에 올라간 그는 조선일보사 기자로 입사해 함흥에서 활약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소덕천국맹하곡정에 은거하면서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주일마다 유학생들과 제휴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모의로 일제에 야합하여

사욕에만 눈이 어두운 친일단체인 상애회(相愛會)에 대항하려고 1925년에

이배근(李培根)등과 모의하여 조선노동동홍동맹(朝鮮勞動東興同盟)이란

비밀결사를 (秘密結社)를 조직하였다.

 

투쟁의 대표적인 것은 19283월에 현 니이가다(新瀉) 산중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일하던 우리 동포 노무자 250여명의 노임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트럭 3대에 동맹단원을 나누어 싣고 니이가다현

경찰서로 쳐 들어가 그 부당성을 따지자 경찰에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하기에,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사무실에 까지 들어가 추궁한 끝에

그간 밀린 노임을 받아 동포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였다.

 

한편 동경의 와세다대학교 정문 앞에 한국문인쇄소 삼문사(三文社)를 동생

봉도(鳳道)의 자금으로 인수하여 경영은 김택(金澤), 서상한(徐相漢)

손을 잡아 흑백신문 동흥노동지(東興勞動紙), 재일본기독교회지, 천도교잡지,

개벽 등 우리말 잡지와 독립은동 사상고취에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암약하였다.

경찰은 이낌새를 알아차리고 인쇄소를 폐쇠후 경영자인 김택(金澤)을 재판에

회부시켜 형무소에서 옥사케 하였다.

 

공은 16개월의 형기 중 9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모진 옥고로

광복을 눈 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19451226일 박열(朴烈) 동지의

주선으로 유해는 고국으로 환송되어 향리에 안장하였다. 공의 독립투쟁의

업적은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독립운동사에 수록되어 있으며 자손들이

독립유공을 정부에 품신하여 1980814 일 건국포장을 추서 받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다시 추서 하였다.

고성군 화화면 당황포에 있는 임진란 대첩기념성역지 입로(入路)

그의 공덕을 기리는독립유공비가 세워져 있다.(고성의 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