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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 주요인물(主要人物 - 10) 충의(忠義)- 갑환(甲煥-25世) - [7]

by choijooly 2024. 5. 16.

 

8. 주요인물(主要人物)

10)충 의(忠義)- (7)

 

ㅇ갑환(甲煥)-25世)

 

공의 자는 자인(子仁)이며 호는 우당(雨堂)이다. 통덕랑공 흥호의 후이고

석우공(石愚公) 순모(舜模)의 장남으로 고성군 하일면 학동에서 태어났다.

공은 타고 남이 총명강의(聰明剛毅)하여 육영재(育英齋)에서 한학을 수학함에

있어 이미 출군(出群)의 기우(氣宇)가 넘쳐 칭송을 독차지 하였다.

일찍 부산으로 유학하여 영남 학생운동의 본산인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전학하였는데 진급함에 따라 동지를 규합하여 항일운동의 선봉장이 되어

우선 악랄한 일인교사(日人敎師)를 배척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수차

정학처분을 받았고, 일제 식민지 교육의 작폐를 시정할 것과 언론결사의

자유를 부르잦어 맹휴를 단행하자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1927년 설상 장덕수(雪山張德秀) 선생께서 향리를 찾으시자 우국충정을

논의 끝에 의연히 민중계몽운동에 나서 삼천포 민주청년동맹을 결성하여

그 집행위원장으로 민족의 자립과 궐기를 호소하고 1929년에는 삼천포농민

조합을 결성하여 집행위원장으로서 시달리는 농민의 자보운동(自保運動)을

크게 펼쳐 악명 높은 동양척식회사 등 일제의 무자비한 수탈에 항거하다 여러 차례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다시 부산제승(釜山製繩)노동조합 사무장에 취임하여

근로대중과 함께 대대적인ㅁ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상해 임시정부의

기금조성을 위해 설립한 부산 백산상회(白山商會) 안희제(安熙濟) 선생의 훈도

(薰陶)를 받아 암투하다가 조직이 드러나 일경(日警)에 쫓기는 몸이 되자

경향각처로 은신하다가 마침내 양산 통도사에 입산하여

머리를 깎고 변신해서 불교에 귀의하였다.

 

이곳에서 학암(鶴庵)의 법명으로 검거를 피하였고 워낙 한학에 조예가

높아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에서 내전(內典)을 두루 익혀 일대시교

(一代時敎)를 마치자, 통도사 운영인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민족의식의

함양과 독립정신의 고취로 자주와 자립의 길을 열어 주기에 힘썼다.

1945815일 광복과 더불어 하산하여 은거하던 동지들과 건국대업에

참여하여 먼저 자치대(自治隊)를 발족하여 부산치안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무정부 상태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패전 일본 군인의 낭동을 민족의 긍지로

제압하여 그들의 귀환을 질서정연하게 수행한 용단은 실로 선생의 빛나는

업적이었다. 또한 경상남도 초대 보안과장으로 혼란기의 치안유지를

견지하였음은 모름지기 획기적인 공적이었으니,

곧 가학(家學)인 남명학(南冥學)의 구현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46년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겨한국민주당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세제민

(經世濟民)의 본궤에 들어가김성수(金性洙), 이갑성(李甲成),신익희(申翼熙),

조병옥(趙炳玉),서상일(徐相日),이인(李仁),곽상훈(郭尙勳),허정(許政),

장택상(張澤相),안호상(安浩相),류진산(柳珍山), 제공(諸公)과 교우하였으며

이어 경상남북도 출신의 요인으로조직된 영우회(嶺友會)의 사회부장,

대한화재보험회사를 설립하여 그 취체역(取締役),세계화재보험회사를 설립하여

그 취체역, 세계고무공업회사의취체역, 공업신문사장 및 대한농수산연구소

이사장, 대한불교중앙종회 의장및 학교법인 화광학원(和光學院)

이사장을맡아 운영하였다.

 

1954년 향리인 고성에서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의정단상에서 재학겸전

(才學兼全)의 사자후로 기지와 직언으로 여야릐 동조를 받이 내외에 성명

(聲名)을 드높이었다. 특히 농림분과위원으로서 주세법을 개정하여 탁주는

술이라기보다 농민의 부식이라는 주장으로 면세를 해준 사실은 의정사상

유명한 일화로 꼽히고 있다. 공은 남달리 풍류를 즐겨 두주불사하면서도

시작(試作)과 서예로 투한(偸閒)하시는 호쾌한 일면도 누렸으며,

고성읍 남산의 충혼탑은 선생의 휘호(揮毫)이다. (고성의 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