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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덕총람(世德叢覽)

8. 주요인물(主要人物)-13) 인물(人物)-鳴虎 13世-秀岡 -爾博-繼相-繼業-洽14世- [7]

by choijooly 2024. 5. 18.

8. 주요인물(主要人物)

13)인 물(人物)-[7]

 

ㅇ명호(鳴虎13)

자는 인숙(仁叔)이다. 선무랑 행 예빈시 주부이며 증 통정대부 군자감 정이고

증손 최진동공(崔震峒公)의 귀()로 가선대부 동자중추부사에 추증외었다.

(고성지)

()최명호(崔鳴虎) ㅣ 의숙공 최강의 자

 

ㅇ수강(秀岡13)

자는 탁이(卓爾)이며 호는 해정(海亭)이다. 공은 훈련참군공 최수용(崔水勇)

6세 손이며 문과 군수공 최준(崔峻)이 증조부이고 문과 좌통례공 최경운

(崔慶雲)이 조부이며 증 참의공 최기복(崔奇復)의 아들이다.

간송 조임도(澗松趙任道)는 북파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춘추필법으로 의론을

높게 세웠는데 그가 해정(海亭) 최공에게 보낸 시에 <최신선이 떠난 후에도

최신선은 남아있네. 밝은 달 맑은 바람을 마음속에 움켜 잡았네> 라고

하였다. 이 시는 해정 선생의 성품이 매우 높고 굳세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재상이 침랑(寢郞)에 천거하여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6品官)에 올랐으며

영창대군이 피살당했을 때, 문간공 동계 정온(文簡公秱溪鄭薀)이 임금에게

상소하니 공이 가서 대학(大學)의 여러 유생들과 그를 위로하고 구원해 줄

탄원의 논리를 펼쳤으나 끝내 흉악한 무리들에 의해 쫓겨나 우설부(雨雪賦)

지어 그의 뜻을 나타내었고,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음풍농월하며 스스로를

즐겼으나 그의 절개는 맑은 바람이고 그의 마음은 밝은 달이다.

간송은 마음으로 해정선생과 허물없이 자냈으니 곧 문창후(文昌候) 최고운

선생과 비견되는 것이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닌가. 공ㅇ은 뒤에 수직으로

가선대부(2품계)에 올랐으며 공의 행적이 철성지(鐵城誌)에 실려있다.

(고성지)

 

ㅇ 이박(爾博 13)

자는 여구(汝久)이며 음직으로 선량장군 충좌위 부사과를 지냈다.(최윤호)

()최이박(崔爾博): 낙남공 최산휘(崔山輝)의 자

 

ㅇ 계상(繼相 13)

송정공 최응룡(崔應龍)의 현손이며 승의랑 주부(承議郞 主簿)이다.

(해평파보. 최우갑)

 

ㅇ 계업(繼業 13)

송정공 최응룡(崔應龍)의 현손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를

지냈다.(해평파보. 최우갑)

 

ㅇ 흡(14)

자는 이화(而和)이며 호는 돈와(돈窩)이다. 천성이 빼어나고 총명하였으며

자태가 단정하고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깊은 도량이 있었다. 6 살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모두 피난하기 바빴는데, 공은 홀로 조용히

숲 속에 숨어서 배고품을 참고 며칠을 건디었다.

 

할아버지 의민공 형제분께서 의병을 일으키자 공은 군대의 막부에 들어가

조금도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8살에 글 배우기를 할아버지에게 청하니

기특하게 여기시고 처음 18사락(十八史略)을 가르쳐 주었는데 몇 달 만에

문리가 완전히 통하여 읽고 암송하기를 그츠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조은 한몽삼(釣隱韓夢參)과 경전의 뜻을

공부하였는데 한공과는 서로 권면하고 격려함이 더웅 돈독하였다.

일찍 상사 이곤변(上舍 李鯤變)과 교유하였는데, 이공이 과거에 응시하여

입신양명함이 선비의 항 일이라 하자, 선친께서 벼슬에서 물러나신 것을 옳다고

생각하며 지금은 기강이 무너지고 풍속이 옛날과 같지 못하니 자손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 하니 이공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1616년 할아바지 의민공께서 별세하자 법도에 맞게 장례를 치르고

임진왜란 때 적은 일기와 벼슬을 사양한 사실을 거두어 모아

1권의 책으로 만들어 보관하였다.

 

공은 산수를 사랑하여 월계봉 아래 몇 칸의 초가집을 짓고 주역의 가돈(嘉豚)의

뜻을 취하여 그 집의 이름을 돈와(돈窩)라 하였다. 그리고 몇 명의 후학을

이끌고 날마다 그 곳에 거처하며 시를 읊조리고 유유 자적하였다(고성지)

(주)최흡(崔洽): 통덕랑공 최흥호의 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