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 주요인물(主要人物)-13) 인물(人物)- 琦衍11世 -魯-崑壽- 게(土自 12世)-濯12世 [5]

by choijooly 2024. 5. 17.

8. 주요인물(主要人物)

13)인 물(人物)-[5]

 

ㅇ 기연(琦衍11 世)

 

자는 규백(圭伯)이다.공은 판서공 최득경(崔得逕)의 5세손이며 호참공 최정(崔涏)의

장자이다.처음에 호참공은 하늘에서 4개의 구슬이 내려오는 꿈을 꾸고 네 아들을

낳았느데 모두 부귀하고 현당하였다. 공은 그중에 장자인데 공의 공적은 임진왜란 뒤

문헌이 많이 없어져버려서 알 길이 없다. 다만 족보에 의하면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 행 훈련원 첨정(종4품)을 지내다가 진주 판관(종 6품)이 되었고

공조참의(정3품당상관)로 추증되었다고 하였다.(진양지. 세헌록)

 

ㅇ 노(魯11 世

 

숙릉(淑陵) 참봉을 지냈다. 아들 휘 산립(山 立)의 학문 입신양명에 전심전력하여

문과 장원급제 할수 있도록 하였으며 향리인 선산(善山)의 추로지향

(鄒魯之鄕)화에 일조 하였다.(최윤호)

(주)최노(崔魯) : 선무랑공 최이회(崔以淮)의 증손

 

ㅇ곤수(崑壽 : 11世)

 

가선대부이고 동지중추부사이다. (해평파보. 최우갑)

(주)최곤수(崔崑壽) : 송정공 최응룡(崔應龍)의 손

〇 게(土自 12世)

 

호는 소연(蘇淵)이며 통덕랑(通德郞)이다. 공은 시조 문성공 최아(崔阿)의

11세 손이며 증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인 최운철공(崔云哲公)의 차자이다.

공은 의민공 최균(崔均)의 아우이고 의숙공 최강의 형인데, 임진왜란 때에

공의 형과 아우는 의병을 일으커 공을 세웠고, 공은 집안 권속들을 이끌고

의령의 자굴산 아래에 들어가서 6년간의 전쟁에 100명이나 되는 가족들을

온전히 보호할 수 있었다. 지금 그 자손을 보니 공의 공적이 두 분 형제보다

적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분 형제들이 만약 집안 사람들이 편안히

거처함을 보지 못했다면 어찌 국가의 일에 전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또 지금

가문이 10,000호나 번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의 공적이겠는 가?

두 분 형제의 일은 국가에 관련된 것이어서 널리 알려졌고, 공의 일은

집안에 관계된 것이어서 알려지지 않은 것 뿐이다. 공의 장남인 익호공

(翼虎公)는 부친을 따라 전쟁을 피하였고, 둘째 아들 최각호공(崔角虎公)은

힘이 호랑이를 잡을 만 했는데 두 분 백부 숙부의 진영에서 큰 공을세웠다.

(세헌록)

 

〇 탁(濯 12世)

 

자는 극수(克修)이며 호는 죽당(竹塘)이다. 선조 무술(1598) 4월11일생이며

천자(天姿)가 영수(潁秀)하고 문 행이 일찍 이루어저서 경오(1630)에 무과에

급제하여 별자 1636년에 광양군수(光陽郡守)로 있을 때 병자호란으로 청나라

군대가 대궐을 침범함을 듣고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출전 중 강화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척화(斥和)할 것을 상소하였다.인조 계미(1643)에 익찬(翊贊)으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청나라 심양으로 인질이

되어갈 때 배종하였다.

 

훗날 중국의 화가 맹영광(畵家孟永光)을 만나 옛날 월왕구천(越王句踐)이

오왕 부차(吳王夫差) 대한 보복의 와신상담 고사(臥薪嘗膽故事)를 담은 회계산

(會稽山) 그림을 청하였다. 청나라에서 돌아와 죽산부사(竹山府使)로 있을 때,

명나라 왕통이 기울어지니 동헌(東軒)벽에 [ 대명은 어느 곳으로 갔느뇨?

천지는 왕의 봄이 아니로다. 사나운 오랑캐를 오히려 죽이지 못했으니 호죽(虎竹)이

이 몸을 부끄럽게 하는구나.(大明何處去天地非王春强胡猶未殺虎竹愧斯身)]의

청나라를 저주하는 시를 쓰고 병을 핑계하여 속리산에 은거하니 병부(兵部)에서

천단기관(擅斷棄官) 하였다고 관율(官律)에 따라 남양(南陽)으로 유배하였으나,

얼마후 재기용하여 청나라 사신으로 가라는 명을 내리자 공은 고두(叩頭)하면서

말하기를 “ 청 오랑캐에게 신(臣)이라고 청하는 것은 죽어도 할 수 없다.” 고

하면서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 것을보고 상(上)께서 관(冠)과

신발을 하사하여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공은 눈믈을 거두고 배사(拜賜)하면서 말하기를 “ 이 관을 쓰고 오랑캐의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을 것이요. 이 신발을 신고 오랑캐 땅을 밟지 않을 것이다.” 고

하였으나 부득이 명을 받들어 청나라에 당도하니, 청 왕이 사정을 수십번 다그쳐

물어도 신이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귀국 도중 인조 을유(1645) 5월 18일에

청나라 옥하관(玉河館)에서 별세했다. 유언으로 반장하는 날에 오량캐의 비단으로

염하지 말 것이며,청 나라 때의 벼슬을 명정(銘旌)에 쓰지 못하게 하였다.

왕께서 부음을 듣고 매우 애통하며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시켜 관을 고치고

염을 다시 하도록 하였고, 또 연도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에게 명하여

제전(祭奠)을 올리고 호송케 하였으며, 통정대부 좌승지에 증직하고 예관과

지관을 보내어 치묘(治墓)를 감독하도 길지를 택하여 장례케 하였다.

 

숙종 경인(1710)에 하동군 북천면 남포에 있는 인천서원(仁川書院)에 향사하였다.

국역된 죽당실기가 간행되어 널리 반포되었는데, 그 서문에 [ 돌이켜 보건데

유림에서 선생을 제향하던 인천서원은 철폐되어 유허가 되었고, 그 후 선생께서

태어나신 하동군 북천면 증촌에 경현당을 건립하여 봉사를 해 오다가 근년에

와서는 선생의 자손들이 성력을 다하여 경현당 좌측에 다시 우모지소(寓慕之所)

로서 숭명재를 세워 선생의 정신을 추모하게 되었다 하니

사문의 다행한 일이 아닐수 없다.]라 하였다.

(진양속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