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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 주요인물(主要人物)-13) 인물(人物)-渾12世-山輝 -塤 -山根-山孝-天老12世)- [6]

by choijooly 2024. 5. 18.

8. 주요인물(主要人物)

13)인 물(人物)-[6]

 

ㅇ혼(渾12世)

자는 극함(克涵)이다. 공은 판서공 최득경(崔得涇)의 6세손이며

명천부사최기준(崔琦準)의 자이다.

공은 병자호란 때 진주영장(晉州營將:정3품당상관)으로서 남한산성의 위급함을

듣고 급히 병마절도사에게 고하여 임금을 보호하자고 수차례 부턱하였으나,끝내

난색을 표하는 것을 보고 공은 칼을 뽑아 난간을 자르며 말하기를 “ 임금깨서

오랑캐에게 포위된 산성에 계신데, 직분이 군대를 통솔하는 장수로서 어찌

감히 난색을 표하는가?“ 라고 하여 병마절도사의 마음을 돌려 행군하려는데

지금 피곤하고 굶주린 병사를 거느리고 간들 승산이 있겠는가의 의문이 생겨

머뭇거리는 중, 당시의 주장(主將)이 군인의 사기를 해이하게 한다는 구실을

붙여 다른 장수로 바꾸어 버렸다.공은 부득이 백의종군하다가 싸움에서 패하자,

그 죄과를 공에게 돌리니 사졸(士卒)들은 원통하다고 소리치고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는 평소에 충의로움이 사졸(士卒)들을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인 것이다. 공은 대명처사(大明處士) 익(瀷)과 죽당선생 탁과는

종형제간이니 평소에 가문의 전통에서 배운 의리가 몸에 베어있는 것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옛부터 충신과 의사(義士)는 소인배들에게 중상모략을

당해 왔으니, 송나라 악비(岳飛)와 우리나라 임경업(林慶業)장군과 같은

사람이 그러하다.(진양속지)

 

ㅇ 산휘 (山輝  12世) 

자는 백옥(伯玉)이며 호는 낙남(洛南)이다. 공은 현감공 최수지(崔水智)의

5세손이고 인재공 최현(崔睍)의 큰 아들이다. 공은 1585년 선조 을류

8월 15일에 태어났는데, 천성이 강방(剛方)하고 어디서나 기상이 늠름하였다.

재예가 숙성하니 모두가 우러러 보았으며 글의 문제도 훌륭하고 그 명성은

세상에 꽉 차 있었다. 여러번 RHKRJ에 응하였으나 적중(的中)하지 못했으니

사우(士友)가 모두 안ㄴ타까워했다. 관찰공(觀察公) 최현(崔晛)이 원무(冤誣)로

잡혀 옥고를 당하니 혈소(血蔬)하고 체읍(涕泣)하면서 한 해를 넘겼다.

왕이 측은하게 여기고 샆살펴주셔서 그는 죄가 없다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인조반정 때 쫓겨난 광해군이 잔당인 류효립(柳孝立)이 반란을 일으키려 할 때

공이 이를 평정하는데 공이 있어서 영사공신(寧社功臣)에 녹훈되고 완해군

(完海君)에 봉하여졌다. 처음에 사첨시 주부(司瞻寺主簿)가 되고,다시 특진하여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충훈부 인각(忠勳府麟閣)에 도형(圖形)되었다

.

왕이 하사한 토지와 노비는 모두 사양하고 첨지 중추(僉知中樞)를 지낸 다음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군민들이 공을

사모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었을 때, 공은 필마단기로

서울로 달렸으나 도중에 길이 막혀 이르지 못하고 되돌아와 의병대장ㅇ으로

나선 관찰공(觀察公) 최현(崔晛)과 함께 경상감사 군중에 머물고 있던 중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리고 왕은 강화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공은 천리길을 달려 조정에 분주하게 물었다. 근친(覲親)하기를 왕에게 청하여

내려오던 중 풍천강 객사에서 1637년 정축 3월 29일에 급히 별세하니

향년 53이 였다. 왕ㅇ느 본도(本道)에 특명하여 전쟁중임에도 후하게 장사

지내게 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증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자의금 부사

이며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단서철권(丹書鐵券)과 19공신회맹록(十九功臣會盟錄)이 있고 영정(影幀)

1본(本)과 불천묘(不遷廟)가 특시(特施)되었으며 문집 1 권이 있는데

계명대학교에 기증하였다. 묘소는 해평면 낙정리 군동에 있고 불천위묘

(不遷位廟)는 해평면 해평리에 있는데,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설, 추석 명절에 향사하고 제사는 매년 후손이 모시고 있다.

(해평파보)

ㅇ훈 (塤12世)

자는 여화(汝和)이며 한성우윤공 최담(崔潭)의 손이고 진사, 예빈시 직장

최운개공(崔云愷公)의 아들이다. 공은 1560 명종 경신에 구만면에서 태어났다.

기품이 준수하고 학문이 넓었으며 집안에서 여러 사촌들과 수학하였고 당시의

이름 난 석학(碩學)들과 서로 권면하니 모든 학자들이 다 탄복하고 의문 나는

점을 질문하였다. 1590년에 경인에 음사로 군자관 판관에 임명되었고,이듬 해에

부정(副正 : 종3품관)에 올랐다. 당시에 왜구들의 노락질이 심하자 상소를 올려

대비책을 마련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답이 없자,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02년 임진에 왜구들이 침입하자 집안의 노복들을 이끌고 4촌형인

군진으로 가다가 길에서 적을 만나 사로 잡히게 되었는데 왜적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자 피살되고 말았으니 하인 남손(南孫)이 평령산 진사공(崔云愷)의 묘아래

]유향의 자리에 장례를 지냈다.(고성지)

 

ㅇ 산근 (山根 12世)

자는 치윤(致允)이고 선무랑이다. 공은 일찍이 부모를 여위고 성동(成童)에

이르러 또 불행하게도 임진난을 당하자 아우 산효(山孝)와 더불어 고향

해평을 떠나 낙동강을 건너 닞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북으로 나아갔다.

태봉(台峰)에 이르러 동생은 거기서 머물고 공은 더 나아가 상주 낙동면

수정곡에 이르러 난을 피하였다. 그 후 M 곳에 은거하면서 고기잡이와

나무하는 일에 낙을 붙여 두문사절하며 여생을 융듀자적하며 세상을

떠났다.(해평파보)

(주)최산근 (崔山根) : 좌통례공 최이회(崔以淮)의 현손

 

ㅇ 산효 (山孝 12世)

일 휘는 숙근(淑根)이고 좌통례공 최이회(崔以淮)의 현손이다.

조실부모한 채 임진란을 당하여 형 산근 (山根)과 함께 낙동강을 건너

북으로 피난가서 태봉(台峰)에 정착하였다. 평생 왜적에 대한 적개심을

품은 채 유유자적하며 은거하였다. 훈련원 봉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해평파보)

 

ㅇ 천로 (天老 12世)

무과에 급제하고 어모장군ㄴ 훈련원 주부이다.(해평파보. 최우갑)

(주) 최천로(崔天老) : 송정공 최응룡(崔應龍)의 증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