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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주요인물(主要人物)-13)인물: 鎰淳23世- 圭澣 23世 [28]

by choijooly 2024. 5. 25.

8. 주요인물(主要人物)

13)인 물(人物)-[28]

 

ㅇ일순(鎰淳 23)

자는 숙현(淑見)이고 호는 경봉(景峯)이다. 나면서 부터 자태가 의연하고 재주가

특출총민하여 서당에서는 스승의 독려없이 스스로 해독하였다. 부지런하여

스스로 몸가짐에 성심을 다하고 부모를 봉양하고 상을 당하였을 때는 곡성이 그칠줄

모르고 애통하고 예를 다하여 치루니 향인들이 이를 칭찬하여 군자라고 하였다.

3형제가 언제나 함께 모여 지내면서 즐거움을 나누었으니 그 우애는남 달랐으며

형들을 아버지 같이 섬기면서 무슨 일이나 언제나 아뢴 후 에 처리하였다.일찍

친지의 간계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바 있었으나 조금도 원망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으며 이후 농사와 양잠으로 열심히 일하여 가산을 회복하니 향인들이

칭송하였다. 고성군 구만ㅁ면 광덕리 입로에 묘비가 있다.(현지확인)

 

ㅇ규한(圭澣 23)

일 휘는 규현(圭峴)이고 자는 상보(尙甫)이며 호는 항재(恒齋)이고 유고(遺稿)

있다. 환여승람에 구만당산(九萬堂山)을 가르켜 이렇게 쓰고 있다.

방장산(方丈山)의 한 줄기가 서북으로 부터 떨어져 내려 옥산이 되고,다시 진주의

계치(鷄峙)를빙 둘러 남으로 내달다가 여러번 꺾여 고성의 추치(楸峙)

이르러 목처럼 맺고 다시일어 천왕봉을 만들고 신치(神峙)에 이르러 또 동북으로

동우산(同友山)이 되고,곧 바로 북으로 가서 농암산(籠巖山)이 되었으니 강우(江右)

제군(諸郡)을 다 이 산맥으로 부터 김해에 가서 그쳤다.

대저 농암이 구만(九萬)의 주봉이 되어 앞에는 큰 들이 있어 마을이 넓고 삼면(三面)

산으로 막혔다. 사방의 거리가 각각 10리나 되니 사람마다 들을 보며 산을 등지고 살아

그 곳에 길을 내고 북족에서 남족으로 바다에 동해도 물이 막힌 곳을 보지 못하니

참으로군자가 살만한 곳이다.소대(蘇臺)의 형제봉이 동남쪽에 있어 우리선조

소호(蘇湖)와 소계(蘇溪) 두 선생이 모여 살았고 판관공 훈() 통덕랑공 흥호(興虎)

찰방공 진호(振虎) 모재공 정호(廷虎) 여러분이 여기에서 나셔서 모두가 임진난

(壬辰亂)에이름이 났다.농암에서 남쪽으로 옥녀봉이 동이처럼 내려와 당산재가

되었으니이것이 우리 우윤공(右尹公)의 묘소로서 고성에 들어와서

첫 번째의 장지(葬地)였다.

 

앞에는 금인사(金印砂)가 물을 거슬려 물을 막고 서쪽에는 무봉산(舞鳳山)이 문창성

(文昌星)이 되고 동북의 증봉(甑峯)이 창고가 되고 적석봉(積石峯)이 요성(曜星)이

되어 서북의 필봉(筆峯)과 서로 당산(堂山) 마을이 북쪽에 있어 최씨(崔氏)의 뭇 이름난

이가 뒤를 이었으니, 영모재공 진추(永慕齋公震樞),산와공 수회(山窩公壽會),산포공 익대

(山圃公益大),상재공 재회(上齋公際會),괴당공 시대(槐堂公始大), 금시당공 상벽(今是

堂公祥壁),병옹공 광윤(病翁公光潤), 자암공 상익(紫庵公祥翼), 용산공 필준(容山公

必儁),삼봉공 상준(三峯公祥駿), 경재공 상순(絅齋公祥純) 등이 모두 이곳에서

유학(儒學)을 번창하게 밝힌 스승들이시다.

 

농암의 동쪽에오도산이 있고 산 밑에 도산서원이 있으니 이것이 우리 두 선조를 모신

곳으로 흥학재(興學齋)에 초 하루마다 향음하는 규약이 있었다.

그 밑에 화촌에는 동악선경(東岳善卿), 묵재 필(墨齋 필), 월화당 극복(月華堂克復)등의

모든 노씨와 우리집안인 감역공(監役公) 항(沆), 오산공(吾山公) 태진(台鎭),정언공

(正言公) 규승(圭升), 사마공(司馬公) 한승(翰升),가천공(可川公) 정기(正基)등

여러분과 진사 박응엽(朴應燁)이 모두 여기에서 나서,어떤이는 유업(儒業)으로

어떤이는 벼슬아치로 모두 당시에 이름을 날렸다.

 

동쪽의주천촌(酒泉村)에는 노묵재,취석정(醉石亭), 박완천(朴浣川)의 후손들이

산다. 심겸와(沈謙窩) 취제(就濟)가 여기서 살면서 경(經) 예학(禮學)으로 이름났고

주천의 남족이 바로 소대촌으로 유독 소계공(蘇溪公)의 후손의 옛 터에 산다.

함헌공(軒公:휘 由礴)이 이 집에서 터 잡아 어사당공(於斯堂公) 정악(靖岳),

낙와공(樂窩公) 기(錡),죽재공(竹齋公) 전(銓)등이 문장으로 이름났다.

현풍곽씨 죽재(竹齋) 간(趕)의 후손이 현풍에서 와서 대대로 살고,또 그 남족은

낙동(洛洞)이 되어 벽진(碧珍) 이씨 평정공 약동(約東)의 후손이 영산으로부터

와서 대대로 산다.,광암촌은 농암의 정남(正南)에 있어우리 찰방공의 둘째아들

처사공 쯥(濈)이 분가하여 와서 지금까지 300년을 그 토지를 지켜 살고 있다.

용당과 와룡은 모두 남써쪽에 있고 이 연동(蓮洞)이 있으니 우리 증조 호군공

상홍(祥泓)과 연고(蓮皐) 이공 걸(杰)이 처음 동주(洞主)가 되었고, 고개 하나

사이에 옛날 진주 땅인 청광(淸光) 중평(中坪)은

모두 우리 종족이수백년살면서 알려진 곳이다.

 

오 ! 최씨(崔氏)가 호남에서 영남으로 넘어와 600년 사이에 사천에서 진주로

진주에서 함안으로 함안에서 선산으로 갈려 고성에 들어 온지가 300년에

두 할아버지의 후손이 한 고을에 꽉 찼고 또 진주로, 단성으로 헤아릴수가 없구나.

처음에 모두 구만골을 고향 삼더니 어짜 백년이 안되어 각 군에 흩어져 살면서도

그 옮겨 온 발 지취를 모르는가.어쩌자는 말인가.

내 이를 위해 기록으로 남기노라.

(주)( 최규한(崔圭瀚):찰방공 최진호(崔振虎)의 후이고

괴당공(槐堂公)최 시대(崔始大)의 5세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