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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主要人物-14)효자(孝子)효행(孝行)[4]-祥珏20世-祥嶔 -祥龍 20世

by choijooly 2024. 5. 29.

8. 주요인물(主要人物)

14)효자(孝子) 효행(孝行)[4]

 

ㅇ 상각(祥珏 20世)

자는  희여(稀汝)이며 호는 제광헌(霽光軒)이다. 공은 해정공 최수강(崔秀岡)의

현손인최섬공(崔暹公)의 증손이고 은재공(隱齋公) 최면ㅇ대(崔鳴大)의 손자이며

만회와공(晩悔窩公) 최광삼(崔光參)의 아들이다.

공은 어려서 부터 글을 배움에 수 천자를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총명했다.

자라서 스승에게 소학(小學)을 배웠을 때에도 어른과 스승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

없었고 과거 공부를 하면서도 권세가에게 아부하거나 청탁하는 일이 없었으며

효행을 독실하게 실천했다. 일찍 선친을 모시고 서울에 말을 타고 유람할 때

길이 미끄러운가, 날씨가 따뜻한가,차가운가를 반드시 살펴보았으며 돌아올 때에

눈과 얼음이 길에 쌓여 있는 것을 근심하여 몸소 말 고삐를 잡고 호위하여

돌아왔다. 흉년이 들자 가난하여 살아갈수 없는 친척들을 두루 돌보아주었으며

어느 날 저녁 선조의 기일이 되자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 오늘 내가 정신이

혼미하여 일을 주관할 수 없으니 너희들이 주관하라." 하시면서 처연하게 눈물을

흘렸다. 그런 후에 한 밤중이 되기 전에 유연하게 돌아 가셨다.

1867년 고종 정묘에 효행과 학문으로 동몽교관의 증직을 받았으며경오년에

정려가 내려 고성군 구만면 화촌에 있고 성재(性齋) ㅎ서전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문집이 있고 행적이 칠성지에 실려있다. (고성지. 고성문화유적지)

 

ㅇ 상금(祥嶔20世)

자는 내현(乃顯)이며 호는 농와(農窩)이다. 공은 해정공최수강(崔秀岡)의

7세 손이며 증 한성좌윤공 최주천(崔柱天)의 5세손이고 최광락공(崔光洛公)의

아들이다. 공은 어려서 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었고 일찍 아버지를 여의자

정성으로 어머니를 받들며 오직 어머니의 분부대로 행동했다. 겨우 취학할

나이가 되었을 때 재주와 생각이 날로 성취되어 15살이 되자. 그에 대한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20살이 되어서는 탄식하며 말 하기를 " 집안이 가난하니 늙은

어머니를 두궁허 함께 봉양할까!" 하고는 결국 농사와 독서를 겸하게 되었다.

낮에는 밭에서 쟁기 질 하고 밤에는 돌아 와 책을 읽고 글을 지었으며 이치에

통달하는 것을 일삼았다. 일찍 경아록(警兒錄) 소학선요(小學選要)들을 보면서

모두 가훈으로 삼았다. 떼때로 벗들과 함께 깊은 산과 계곡을 찾이 다니며

음풍명월하는 것을 취미삼기도 했다. 일찍 농가(農歌) 4편을 지었는데 모두

332장이었다. 장마다 심자(心字)를 써서 시작과 끝을 삼았으니 이것은

효제충신(孝悌忠神)으로써 심성의 근본을 삼은 것이니 사람듥로 하여금

느껴서 본받게 한 것이다. 그 농가(農歌)는 한문과 한글을 섞어 만들어 비록

부녀자나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모두 전해 익힐수 있었다.

가선대부로 추증 되었다.

 

ㅇ 상룡(祥龍20世)

호는 송학재(松鶴齋)인데 참의공 최요할(崔由硈)의 5세 손으로 첨추공 최광언(崔光彦)의

자이다.효행과 진휼시혜(賑恤施惠)로 널리 명성이 들 났으며 향리에서 누차

장계를 올렸다. 별세하자 이회보(李晦甫)가 글을 지어 곡하며

" 슬프다.나와는 동갑으로서 특별히 의가 두터웠으며, 선조의 위업을 이어 받드는데

힘을 다하였다. 예위(禮圍)의 웅거에 추천받았으나 구차한 득책(得策)은 수치라

하여 거절하고 부모 봉양에만 정성을 바쳐 모시고 따르며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라 하였다.(고성지. 고성향교지)

(주)최상룡(崔祥龍): 통덕랑공 최흥호의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