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147 9. 효. 열부(孝.烈婦)-3) 정렬(貞烈)[10]- 河氏- 河氏 9. 효.열부(孝.烈婦)3)정렬(貞烈)[10] ㅇ 하씨(河氏)최한진공(崔翰鎭公)의 처이고 태계(台溪) 하진(河溍)의 후이다.남편이 일찍 죽자 발인까지의 예를 다하고 시부모를 위로 하였다. 장사 이틀전에몰래 간수를 잇달아 마시고 미역귀를 계속 씹으니 마침네 곧 죽었다.고성군 구만면 광덕리 도로변에 동서 재렬이씨(崔曉鎭公의 妻)의 열행을표하는 쌍열비기 있다.(고성지. 환여승람.고성문화유적지)(주)최한진(崔翰鎭 22世):통덕랑공 최흥호의 후이고 최상악공(崔祥岳公)의 손 ㅇ 하씨(河氏)사인(士人) 최상린공(崔祥鱗公)의 처이다.시어머니와 맏 며느리의 상이 함께있어 시아버지의 명령으로 집안 살림살이를 맡아서모든 조카들을 기출과같이 가르치고 기루었다. 이러다가 남편이 죽으매 마음속으로 따라 죽으려고맹세하면서도 밖으로.. 2024. 6. 3. 9. 효. 열부(孝.烈婦)-3) 정렬(貞烈)[9]- 崔氏- 崔氏- 崔氏-崔氏-崔氏-崔氏 9. 효.열부(孝.烈婦) 3)정렬(貞烈)[9] ㅇ 최씨(崔氏)최씨는 이름이 성남(聖南)이고 전주인 최주순공(崔鑄淳公)의 딸이며 함안인이보환(李寶煥)의 처이다. 16살에 출가하여 시부는 인자하였으나 시모는 성품이까다로웠고 남편은 7남매중 장남인데 성질이 급한데다 귀가 어둡고 어눌하였다.집안이 가난하여 20여 식솔들의 의식을 해결하다 보면 최씨의 의복은 조각조갇대 입고 조석끼니도 제대로 찾아 먹을수가 없었다.거기다가 밭에서 일하다 피로에 겹쳐 쓰려졌는가하면,얼굴은 누렇게 붓고허기져서 눕는 날이한두 번이 안니었다.때로는 품 팔고 틈틈이 가축기르기.춘추로 양잠하기,삼베 무명 베짜서시장에 내다 팔았다. 빙이 좁아 발을 뻗지 못하여밤 새운적이 많았다.그러니 이 같은 고난을 여기지 않고 한평생 심혈을 기울려정성껏 시.. 2024. 6. 3. 9. 효. 열부(孝. 烈婦)-3)정렬(貞烈)[8]- 千氏- 崔氏 - 崔氏 - 崔氏 9. 효.열부(孝.烈婦)3)정렬(貞烈)[8] ㅇ 천씨(千氏)천씨는 휘 수련(水連)이고 영양인 천명석(千命錫)의 딸이며 전주인최규석(崔圭錫)의 처이다. 천씨는 중년에 남편을 잃고 또 아들의 전사(戰死)까지잇달아 겪으면서도 종부로서 대소가내의 우애돈독과위선봉사의 정성이 지극하여향리에서 칭송이 자자 하였다.더구나 넉넉지 못한 재산임에도 집안에서 건립하려는 제청(祭廳) 부지 마련을위하여 100여평의 부지를산듯 무상기증하여 오늘의 매화정(梅花亭)을있게한 장본인이다.이 공적을 시종질 원호(元鎬)씨가 비문을 쓰고 매화정 경내에"유인 영양천씨 공적비(孺人潁陽千氏功績碑)를 세웠다.(현지확인)(주)최규석(崔圭錫 23世): 해정공 최수강의 후이고 최광보(崔光輔)공의 현손 ㅇ 최씨(崔氏)최씨는 전주인 최근홍공(崔根洪公)의 딸.. 2024. 6. 3. 9. 효. 열부(孝. 烈婦)-3)정렬(貞烈)[7]- 諸氏-趙氏- 曺氏 9. 효.열부(孝.烈婦)3)정렬(貞烈)[7] ㅇ 제씨(諸氏)최상락공(崔祥樂公)의 처이다. 칠원인 제의조(諸毅朝)의 딸로 천성이 정숙하엿고여자다운 풍모가 있었다. 남편이 돌림병으로 31살에 죽자 슬픔을 감추고 여러 시숙과시동생에게 말하기를"죽은 사람은 이미 어쩔수 없다. 원컨데 몸을 잘라내는 슬픔을참고 빨리 염습을 끝내어 장례를 마쳐 달라" 고 했다.이윽고 파리 잡는 비상을 탄 물을 마시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당시 사람들이 여러번 관청에 이 사실을 알리는 글을 올렸으나 표창되지 않았다.고성굼 마암면 석마리 도로변에 정려비가 있다.(고성지. 고성문화유적지)(주) 초ㅛㅣ상락(崔祥樂 20世):서산공 최처회(崔處會)의 증손 ㅇ 조씨(趙氏)함안 조씨이며 팜판 조태현(趙台鉉)의 딸이고 최중진공(崔仲鎭公)의 처이다.조.. 2024. 6. 3. 9. 효. 열부(孝. 烈婦)-3)정렬(貞烈)[6]- 鄭氏- 鄭氏-鄭氏-諸氏 9. 효.열부(孝.烈婦)3)정렬(貞烈)[6] ㅇ 정씨(鄭氏)본관은 진양이며 공대공(共戴公) 척(陟)의 후이고부사용(副司勇) 일양(一陽)의 딸이다.17살에 전주 최용호공(崔龍鎬公)과 성혼하였으나 남편이 숙질(宿疾)이 있어 곧 병상에눕자 정씨를 친가에 보내어 2년이 경과한 뒤에 남편이 죽으니 부상(夫喪)으로 통곡하며절명에 이른지 여러번이었다. 그러나 집안 사람들이 보호하여 깨우쳐 잘례한 후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시부모가 있으며 부제(夫弟) 3남매가 모두 어려서 위탁할 바 없고,또 남편의 후사가 없음을 두려워하여 이에 애통함을 참고 가정을 다스려 나갔다.가세가 빈약하여 방직을 일삼아 생계를 보장하며 들불을 벗삼아 밤을 새웠다.마침 부제(夫弟)인 최구호공(崔龜鎬公)의 자 락서(洛瑞)를 후사로 삼아 공부릏 하게하여.. 2024. 6. 3. 9. 효. 열부(孝. 烈婦)-3)정렬(貞烈)[5]- 李氏- 李氏-李氏-李氏,金氏 雙節 9. 효.열부(孝.烈婦)3)정렬(貞烈)[5] ㅇ 이씨(李氏)본관은 제령 모은 이오(茅隱李午)의 후이고 최요진공(崔堯鎭公)의 처이다.남편이 죽자 6일만에 유복자 아들을 낳아 3년을 양육하면서 시부모를 극진히섬겨 어린아이로 하여금 정을 붙여,평상시와 같았으나 대상일(大祥日)에장롱속의 옷을 내어 3벌을 끼어 입고 어린 아이에게 집안의 명예를보존토록 유서를 남겼다. 고성군 구만면 광덕리 도로변에 동서 진양하씨(崔翰鎭의처)와의 열행을 표하는 쌍열비가 있다. (고성지. 환여승람.고성문화 유적지)(주) 최효진(崔堯鎭 22世)톹덕랑공 최흥호의 후이고 최필암공(崔必嵓公)의 자본관은 제령 모은 이오(茅隱李午)의 후이고 최요진공(崔堯鎭公)의 처이다. ㅇ 이씨(李氏)본관은 벽전이며,사인(士人) 이승효(李承斅)의 딸이고사인(士.. 2024. 6. 1. 이전 1 2 3 4 5 ··· 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