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산공 기필묘 (茅山公 琦弼墓)
7. 비 명(碑銘)
1) 신도비(神道碑)
ㅇ 모산공 최선생 묘갈명(茅山公崔先生墓碣銘)
임진왜란 당시에 국가의 충렬(忠烈)을 바쳤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진주성(晉州城)에서 순절한 분들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모산선생(茅山先生)은
그 가운데 한분이시다.국가에서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종하고 포상해
주었고 사림(士林)들은 청렬사(彰烈祠)에 배향하여 존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데,
공의 휘(諱)는 기필(琦弼)이고 자는 규중(圭仲)이며 전주최씨인데
고려조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시호가 문성공(文成公)인 아(阿)가 시조다.
그후 안렴사(按廉使)를 지낸 용생(龍生)과 사복시정(司僕侍正)을 지낸 사필(斯泌)을
거쳐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득경(得涇)이 문과에 급제하여 판서를 지냈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효량(孝良)이 바로 공의 고조부이시다.
증조부는 첨정(僉正)을 지낸 륜(崙)이며, 조부는 진사(進士)인 영견(永甄)이다.
고위는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추증된 정(涏)이며 비위(妣位)는 정부인
밀양손씨(密陽孫氏)인데 호군공(護軍公) 난우(蘭友)의 딸이다.
참판공 정(涏)이 일찍이 집뒤에 우뚝 솟아있는 모산(茅山)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우리 자손들은 반드시 저 산과같이 우뚝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하늘에서
네 개의 구슬이 내려오는 꿈을 꾸고 과연 네 아들을 연거푸 낳았으며 모두 현달하였다
공은 셋째 아들로 가정 임술년(嘉靖 壬戌年 1562년 明宗 17年) 4월 11알 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조숙하여 7살 무렵에 이미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섭렵하였으며 학문도 일취월장하였다.“맹자(孟子)“의 구절 가운데
”위세와 힘에도 굴하지 않는다” 는 구절은 읽고 무릎을 치며 말하기를
“ 대장부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위었는데 법도에 따라 상례를 치르는 것이 어른과 같았고,
공의 통곡소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마음 아파하고 감동하여
“효성스러운 아이”라고 칭찬 하였다.
임진년(壬辰年) 왜군이 크게 침입하여 온 사방이 와해되었지만 진주성(晉州城)만은
관원이었던 김시민(金時敏) 때문에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키며 혈전을벌여 많은 적군의 목을 베고 그 다음해인 계사년(癸巳年)에 왜구들이
다시 성을 압박 공격하여 함락 위기에 처했을 때 공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말하기를
“이 성이 없으면 삼남(三南)지방은 끝내 지탱할 수 없고 왜구들이 다시 종묘와
궁궐을 반드시침입할 것이니 지금 어찌 신하로서 목숨을 아까워 할 때인가?“ 라
하고 의병의 깃발을 높이 올려 집안의 종 60여명을 이끌고 우ㅏ험을 무릅쓰고
진주성에 들어가 김건재(金健齎), 고준봉(高準峯)등 여러 사람들과 죽음으로
성을 지킬것을 맹서하였다. 그리하여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키며 혈전을 벌여
많은 적군의 목을 베고 사로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얼마뒤에 비가 내려 성이 무너지자 포악한 왜놈들이 성에 난입하여
겹겹이 포위를 당하였고 구원병 조차도 없고 식량도 떨어졌으며 병마절도사
(兵馬節度使)인 황진(黃進)과목사(牧使)인 장윤(張潤)등이 모두 적탄에 쓰러
지자 공은 더 이상 버틸수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적병의 칼에 죽을수 없다고
생각하여 임금님이 게신 북족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창의사(倡義使)인
김천일(金天鎰), 의병장 고종후(高從厚)와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 순사하니
때는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6월 29일이며 나이는 겨우 32살이였다.
남겨 놓은신 의관으로 진주 서쪽 상대동(上垈洞) 부태(負兌)의 벌에 장사
지냈으며 배위인숙부인 (淑夫人) 면천 한씨(沔川 韓氏)도 그 곳에 합장하였다.
공은 기개가 잇고 성품이 올 곧아서 구차하게 남들과 영합하지 않으므로 글을 읽어
큰 뜻을 알게 되면 힘써 실천하였다. 부모를 섬기고 형제를 우애로 대하고 마을에
거처하면서 언제나 올바른 도리를 다 했다.선비들과 전대의 역사를 토론하다가 고인
들이 순절한 대목이 나오면 언제나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으니 의로운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결심이 이처럼 마음속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그러므로 국가의 대란이 닥쳤을 때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맨손으로 적병의 침입을 막아내며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도 불사하였으니 충성심과 매서운 기운이 해나 달처럼 빛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
임진난 후 조정에서는 진주산성에 정충당(旌忠壇)을 세워 그 때 순절한 사람들을
함께 배향토록 하였다. 또 선무공신(宣武功臣) 원종(原從) 2등공신에 기록되었다.,
사당을 건립한 뒤에는 창열(彰烈)이라는 사액 현판을 내려 주셨다.또 촉석루 앞에
있는 비문을 보면 그 뒤의 얼사(臬司)나 곤수(閫帥), 전상(銓相)등 여러 사람들이
공을 선양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였음을 알 수가 있으니, 어찌 다만 직위를 높여주고
제사를 모신것 뿐이겠는가 ? 배위 한씨(韓氏)는 문정공(文正公) 표(彪)의 후손인
대박(大璞)의 딸인데 훌륭한 덕이 있고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겸비하였다.
두 아들을 낳았는 데 수(洙))는별제(別提)를 지냈고 익(瀷)은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다. 수(洙)는 2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립(振立)과 사립(斯立)이며
딸은 류인형(柳寅亨)에게 시집갔다. 익(瀷)은 아들이셋인데
인후(仁厚),종후(從厚),이후(以厚)이며 증손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명(銘)을 짓는다.
나라가 믿는 것은 충성이니, 충성을 바쳤다는 점은 똑 같다. 그러나 살아서 성을
지켜 사람들의 충성심을 격발시키는 것은 죽어서 성을 지켜 공을 세우는 것만
못한 법이다.‘진주성(晉州城) 순절을 지켜본 전국의 많은 백성들은 호남북
(湖南北)에서 관동(關東)관서(關西)지방에 이르기 까지
그 모습을 모두가 사모하였고, 앞 다투어 충성을 다 바쳐
자신의 영토를 지켜 내었다. 그래서 이 사실을 특별히 기록하여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하노라.
.(* “모산선생실기“ 서문내용 일부첨가, 세헌록)
통훈대부 전행사헌부장령 진양
정종로(晉陽 鄭宗魯) 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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