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간공 인재 현신도비(定簡公訒齋晛神道碑)
7. 비 명(碑銘)
1) 신도비(神道碑)
ㅇ정간공 인재 현신도비(定簡公訒齋晛神道碑)
공의 휘(諱)는 현(晛)이고 자는 계승(季昇)이며 호는 인재(訒齋)이다. 공의 본은 전주요
시조 휘는 아(阿)이며 고려 말에 정승을 지냈다.시조의 6세손휘는 수지(水智)요 선산 해평을 지나
다가 여기에 시거하니 자손이 번창하였다.휘 이회(以淮)는 벼슬이 주부(主簿)이고 증 좌통례이다.
휘 치운(致雲)은 벼슬이 참봉이고 증 좌승지이다.휘 심(深)은 증 좌참찬이다.이상은 공의 증보부,
조부,부이며 공의 공덕으로3대에 걸쳐 중직이 제수되었다.비(妣) 중 정부인 성산이씨는 경은선생
맹전의 증손녀이다. 공은 약관에 학봉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27살 때 생원에 급제하고 44살때 대과에 오르다,공은 옥당과 한원의 여러 벼슬에 종사한 후
광해군의 비정을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조용히 은거하면서도 나라를 근심하였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왕의 신임을 받아 삼사(三司)의 맑은 벼슬을 두루ㅠ거쳐 관찰사에 이르렀다.
벼슬은 자리마다 요직을 거쳤으니 관직의 서열이 높지 않음도 아니었고 탁월한 재능이 사용되지
않음도 아니었으나 공의 평생을 논할 때 길게 탄식하지 않을수 없으며 혹자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니 이는 왜 그럴까! 공은 천성자품이 넘쳐흐르고 재능과 지식이 탁월하였다.사우간에 모이면
한 시대의 대업과 경륜을 즐겨 발의하였다.31살 때 임진왜란을 맞아 한 민간인으로서
체찰 막부(體察幕府:일선에서 왕권을 대행하는 최고통수부)에 서장을 보내니 이는 모두 나라를
다스리고 난을 평정하는 계책이 었다.체찰사 이원익은 이에 감탄하여 건원능 참봉을 제청하니
벌써 상명으로 제수되어 있었다. 이전에 왕에게 만언(萬言)을 진소한 9조소(九條疎)가 있으니
이는 모두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폐단을 신랄하게 파혜친 것이었다.
그 사이 병이들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대과에 급제한 후 한림 설서 정언 등
벼슬을 거치면서 벼슬길의 험난함을 느끼어 9지명(九知銘:아홉 조목의 좌우명)을 지어
스스로 반성하고 처신을 바르게 하였다.명절 때 명나라 북경에 파견하는 사절단의 서장관이
되어 갔을 때 객사나 내왕길에 엄하게 규율을 세워 전자에 흔히 있었던 온갖 폐단을 제거하였다.
돌아와서 곧 정언, 지평을 거쳐 실록청 도청(임지왜란의 역사를 편찬하는 최고 책임자) 체찰 막부
종사관이 되어 암행어사로서 압록강변의 군사상황을 답사하였다. 돌아와서 복명하고
관서록(關西錄)을 제작하여 체찰부에 제출하니 이덕형과 이항복이 크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어 영남, 호남지방의 전 후민심을 수습하고 이완된 해륙의 방비를 정비하는 사명을 띤
양남순무어사(兩南巡撫御使)로서 3년간의 임무를 마치었다.
다음에 호운관의 교리등 옥당 벼슬을 지낼 때 광해군이 궁중에 드나드는 한 술사(術士)의
말을 받아들여 교아(交阿:지금의 김포)로 수도를 옮길것을 결정함에 공은 옥당 차문(玉堂箚文)을 올려
극력 이를 반대하였던바 마침내 이 계획은 폐기되었다.또한 왕이 바야흐로 자기 생모를 추존 하려고
조정에 여론을 일으켜 공에게 주청할 것을 꾸짖어 명령함에 공은 이번에도 차문(箚文)을 올려
“가무 이존(家無二尊)이오 예무 이적(禮無二嫡)입니다.노은(魯隱)이 중자(中子)에 한 것과
희공(僖公)이 성풍(成風)에 한 것을 역사는 이를 크게 잘못된 일이라 하였으니
나라에 두 임금이 없음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하고사양하였다.
이이첨이 대비가 영창대군ㅁ을 옹립하여 모변을 일으키려 한다고 무고하니
크게 옥사가 벌어지고 대군을 처형해야 한다는 의론이 비등하였다.
공정한 여론이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나 무익하였다.
공은 다시 사간원 정언으로 옮겨서 처형 결의에 발언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공은 규피지계(規避之計)를 써서 이에 불참하니 적당들은 공을 규탄하고 벼슬을 삭탈하였다.
고향에 돌아온지 11년 후에 인조가 반정을 하고 공에게 수찬 겸 도원수 조정관을 제수하니
공은 “흉악한 무리들이 무고를 하고 대군을 살해하려고 하였을 적에 신은 언관으로
있으면서 한마디 말도 못하였고 정온처럼 죄를 받지 않고 전원 고향에서 연명하였으니
어찌 감히 세상에 나서리오,” 하였다. 그 후 공은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등 청직을 거쳐
승무원 부제조에 이르렀다. 그 때 조정 신하중에 재능이 장수직을 감당할 수 있는 자
10여명을 천거하라 하였을 때 공이 이에 해당되었는데 모두가 당대 1급 명사들이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반정공신으로 자만하는 자들의 행패가 심하고 나라의 정사가 이들에
의해 흔들려 민심이 흉흉하였으며 서북방 국경지대에서는 호적(胡敵)과 충돌이 빈번하였다.
공은 인조의 지우(知遇)에 감격하면서도 일신의 안위를 돌보자 않고 나라의 득 실을 알고
느끼면 말하지 않음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지런하고 ?꾸준하고 끈질기게
언관으로서 직무를 다하여 그치지 아니하니 누차 그 뜻이 채택되었다.
옥당과 어전에서 강의할 때는 학문에 주력하기 보다는 현실 정치에 왕도를 베풀도록 힘썼다.
옥사가 남발되어 거리에는 자칭 공신이 횡행하고 감옥에는 무고한 죄인이 넘치고
있는 것을 개탄하고 붕당이 심하여 공과 사가 민란함을 역설하였다.
어적지책(御敵之策)을 강의할 때는 말하기르르 “ 만약 북방의 호적이 장구하여 쳐 들어오면
현재 이 나라의 병력으로는 맞서 싸우는 것이 불리하여 일단 그 기세를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 민심을 수습하여 요소에 성을 쌓아서 견고하게 지키고 들과 마을에는
일체의 식량을 철거하고 적이 깊숙이 들어와서 피곤하여지면 유격전과 병행하여
이를 격퇴해애 합니다. ” 하니 왕이 함께 술울 들자하고“ 황주에서 서북방 군비상황을 시찰하라.”
하였다.이팔이 서북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은 심야에 공을 불러서
“ 다시 독전어사로 서북에 가라. 이 칼을 줄테니 부원수 이하 힘써서 싸우지 않은 자는 참하라. "
하였다.임진강에 이르러 보니 관군의 사기는 형편이 없고 도원수 장만(張晩)은 후퇴만 하니
공은 왕에게 자안의 죄를 다스리기를 품하였고 장만 또한 공의 월권을 탓하는 계문을 올렸다.
안현에서 적을 격파할 때는 이수일(李守一)이 도원수였고 장만은 백의종군 하였다.
공주 행재소에서는 논공에 대해서 의논이 분분하였고 앙능 서울 환도 후 공의 의견을 물었을 때
공은 “안현 대승은 오직 장만의 작전계획에 힘입었습니다.” 하니 왕은 장만을
최고수훈자로 정하였다.....
한번은 대비의 측근에서 일 보는 자가 서울 거리를 쏘다니며 대비를 빙자하여 행패를 부렸다.
사헌부에서 이를 체포하ㅓ여 죄를 다스리니 대비가 왕에게 부탁하고
왕은 공에게 “가서궁노(宮奴)를 타이르고 대비의 뜻을 전하라“ 하였다,
공이 가서 보니 그 죄상이 너무나 꽤심하여 돌아와서 그의 사면이 불가함을 아뢰었다.
대비는 왕에게 다시 부탁하여 공은 세 번이나 다녀와서 같은 말을 왕에게 하였다.
마침내 왕은 노하여 ”경은 대비와 나에게 죄를 지울 셈이냐“ 하니
공은 ”신이 오히려 전하에게 죄를 지을지 언정
전하가 백성에게 득죄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왕에게 차문(箚文)을 올려 극언하기를
“근일에 천체에 이상한 변괴가 잦고 이에 따라 북방의 호적이
호시탐탐 침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원로들은 머뭇거리기만 하고
신하들은 멀리 앞날을 내다보지 않고 있으며 훈신들(반정 때 공이 컸던 대관들)은
군관을 모집하여 사사로이 자기 저택에 머물게 하여 위세를 자랑하고 있다.”하니
훈귀(勳貴)들은 대노하 “모(某)의 말은 나라의 기둥을 흔들어 불측한 자들에 대한
사찰을 없에게 할 의도이며 그의 속셈이 매우 의심스럽다.” 하고 왕에게 고하였다.
아 ! 공의 마음은 오직 나라와 임금에게만 있고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으니
글자 한자 한자 쓰면서 탄식하노라 !나라와 백성을 위한 그의 뜻은 이루워진 적도 있고
이루지 못한 적도 있다. 함정이 깔리고 돌맹이가 날라오니공은 끝내 그 깊은 뜻과
경륜을 펴지 못하고 만 것은 그 근원이 달리 있음이 아니라그를 슬퍼하노라 !
마침 김원(金愿)이란 역적모의한 자를 잡아서 매질을 하니 김원은 공을 끌어 들였다.
찬성 김 유(金瑬)일당이 일제히 일어나서 공을 규탄하니 왕은 그럴 까닭이 없다 하고
공을 문초하지 말라 하였다.
부제학이 되어서 차문(箚文)을 올려 관제,전제(田制),병제 등의 폐정을 논하고
과거와 현실을 비추어 개진한 8개항으로 된 당무(當務)를 밝혔는데 모두가 시의 적절한 것이었다
미기(未畿)에 감사 겸 병마수군절도사로 강원도에 부임하였는데 다믕해에 오적이 침공해 왔다.,
공은 정병을 뽑아서 동해안을 방위케 하고 나머지는 몸소 이끌고 한진(漢津)에서 진을 쳤다.
평안도 지방 도원수 진에는 식량과 무기를 끊임없이 보내고 한편으로는 격문을 써서 사방이 띄웠다.
각처의 산비들은 크게 감동하여 궐기하였으며 의병이 위세를 떨쳤다.
적이 일시 후퇴하였을 때 공은 비분강개하여 다시 만언소(萬言疎)를 올렸다.
그 요지는 먼저 뜻을 세우고 다음에 기강을 세우고 불필요한 관원을 도태하고
군병을 양성하고 재력을 축척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는 것이 다섯가지 급무라 하였다.
상소문 끝에는 “강남의 남한산성은 만전(萬全)의 땅이 못되고 무주 적상영(茂朱赤裳營)의 수군과
서로 성원 호응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유사시에 대비하는 것은 때를 늦추면 안될 것입니다.” 하니
왕은 이를 가납하여 조정 대신에게 충분히 논의하라고 명령하였으나 끝내 채용 되지 않았다.
공이 지방으로 출순(出巡)한 사이 횡성(橫城)의 우국고사(憂國高士)로 자처하던
이인거(李仁居)란 자가 반란을 일으켰다.원주 목사인 홍보(洪寶)가 이인거를 잡아서 서울로 송치 하였다.
전부터 공은 이인거를 의심하여 떠날 때 홍보에게 밀명을 내려 이인거를 철저히 감시하라 하였다.
그러나 홍보는 이 사실을 외면하면서 1등 공신이 되고 공을 미워하던 자들은 공이 이인거와
내통하였다고 우겨되어 공을 서울로 호송케 하고 금부에 투옥 하였다.
김류(金瑬) 일당이 공을 처형할 것을 극력 주장하니 왕은 “언젠가 현(晛)이 심야에 입궐하여
한 궁리(宮吏)의 과실을 직진함에 과인은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후에 생각해 보니 그는 진실로 나를 사랑하는 자 였음을 깨달았다.
그러한 자가 어찌 역적와 통하겠는가. 즉시 석방하라“ 하였으나 반론이 심하여 회령으로 유배하였다.
1년만에 풀려나서 고향에 은거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양천식이란 무뢰한이 역적에 몰려 문초를 받을 때
공을 대장으로 추대했다고 토하여 공은 또다시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번에도 왕은 전과같은 말을 하고 공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아 ! 인조가 공이 바르고곧은 말을 가상히 여겨 잊지 아니하였으니 인조의 명성(明星)함이
공의 고충직도(孤忠直道)와 더불어 결주지심(結主之心:군신간의 깊은 사이)을 엿보게 하는구나 !
신상에 불행한 일이 거듭된 말년을 보내고 향년 78세로 무주 근처 별제에서 졸하고 선산 머들에
장사지냈다. 왕은 예관을 장지에 파견하여 조제하고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예조판서를 증한 것은
선례를 따른 것이니 봉 완성군(封完城君)은 아들 산휘(山輝)의 훈공이기도 하다.
공은 일찍 사문(師門)에 오르고 후일에 한강 여헌 제선생 문하에서 더불어 유학의 진수를 터득하였다.
병법과 수학,천문,지리 등 능통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100년이 지난 지금 공이 남긴 것은 논리정연한
문장과 언론뿐이로구나. 공이 미몰(未沒)에 이미 남한산성에서 왕이 무릅을 꾸는 치욕이 있었으니
공이 누누이 예견하고 말한 것이 불행하게도 모두 적중하였다.
공을 배척하고 그의 정론이 채택되지 않았음은 공의 불행이라 할 수 없고
실로 세운(世運)이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후세에 공의 글을 독서하는 자 중에는
눈시울이 뜨거워 지고 길게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하 가계설명 중략)
이 비에 명(銘)하여 말 하노니 군자의 학문은 그 근본이 중요한데 옳거니 !
최공은 퇴계선생 연원(淵源)인 학봉 김성일(金誠一) 및 한강 정구(鄭逑) 문(門)에서 수학하여
사문(師門)을빛내고 스스로 분발하여 몸소 실천 하였도다.인조 임금 지우(知遇)받은 특총(特寵) 연유무엇인가.
더울때는 시원한 울타리 되며 국가우ㅣ난 해결하여 근심을 덜고 어려운 나라 살림 공이 맡아 하였구나.
안으로는 벌문(閥門)이 빛난 공적에 족친이 번성하나 밖으로는 호시탐탐 오랑캐 넘보는데 단심(丹心)을
기울여서 공의 가모(嘉謨:좋은 계략)주상하니 상(上)께서 탄복함며 아름답다 칭찬 하네.
국정을 전횡하는 권신을 비방하고 직간(直諫)으로 그 비행 낱낱이 규정(糾正)하니 좋은 기회 스스로
돌을 던져 망친 격, 마침내 화를 불러 폄적(貶謫: 귀양살이)되어 떠났는데 상(上)게서 얼마 후에
공의 충직 아시고서 위리(圍離)를 풀게하여 죄를 용서 받았소.
신병은 자처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병자호란이 일어서 남한산성 몽진
(蒙塵)의 수모 겪으니 공이 실로 선견지명을 지닌 영준(英俊)이라 하도다.
성명(聖明)하신 인조께서 공의 보필(補弼) 바랐으나 끝내 보답 못하고서
세상을 떠나시니 묵평(默坪)의 산기슭에 공의 유택 모셨구나.
나 여기 돌에 세겨 절의(節義)굳은 군자라고 칭송하며 밝히노라.
(해평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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