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7.비명(碑銘)-1)신도비(神道碑)-의숙공 소계 최선생 신도비명(神道碑銘)

by choijooly 2024. 5. 4.

의숙공소계최선생 신도비명(義肅公蘇溪崔先生 神道碑銘) 

 

7. 비 명(碑銘)

 

   1) 신도비(神道碑)

 

ㅇ 의숙공소계최선생 신도비명(義肅公蘇溪崔先生 神道碑銘)

고성군 구만면 광덕리 광암 소재

 

불녕(不佞)이 이미 고성의 전주 최씨를 위하여 그 선조 임랑 훈신 의민공 균(均)의

신도비 명을 찬하고 또 그 계공 의숙공의 신도비 명을 찬하게 되었다.

아아 ! 그 쌍충 탁절(卓節)이 천추에 휘영하도다. 공의 휘는 강(堈)이요, 자는 여견(汝堅)

이요, 호는 소계(蘇溪)요, 그 선세는 전주인이니 고려 문화시중 문성공 아(阿)로부터 고려,

조선 양조에 계승 현달하여 경상도 안렴사 공 용생(龍生)과 3세를 지나서 사복시정공

사필(斯泌), 현감공 자경(子涇), 문(文) 현감공 증 도승지 수지(水智), 군수공 이식(以湜)은

모두 문과에 올랐으나 군수공은 공에게 고조였고 증조 윤신(潤身)은 무과첨사요,

조고 담(潭)은 참봉 중 한성우윤이요, 황고(皇考) 운철(雲哲)은 증 형조판서요,

비(妣)는 증 정부인 청풍김씨 참봉 덕후의 딸이다.

공은 젊었을 때부터 풍의가 준상하고 효용(驍勇)이 절륜ㄴ하였으며백공에게 업(業)을

받아 명경(明經)으로서 여러 차례 향해(鄕解)에 합격하였으나성위(省圍)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을 때 백공의 권유에 따라선조 을류 무과에 제일에 올랐다.

임진의 난이 일자 곧 백공과 함께 독산(獨山)에서 의병을 일읔켜 구만동의 초전에

크게 승리하였고 그 뒤를 이어 향하는 곳 마다 문득 전공을 세웠다.

가전(家傳)된 문자가 산일되어 고거(故據)할 바 없으나

국사와 야승에 실린 것만으로도 경개(梗槩)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은 김덕령의 별장으로서 병세를 떨쳐 영천에서 많은 적을 섬멸시켰고 김대명과

함께 사천에서 진주로 행하는 적을 깨었으며 계사 6월에는 왜추(倭酋) 30만이 동래로부터

진주로 행할 때 공이 이달,안신갑과 함께 스며들어 격퇴하였고 9월에는 함안,웅천의

적을 물리쳤다.또 김시민과 함께 기지를 짜 내 전략을 정한 다음 우회해 대둔령의

적을 깨치고 진해의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진주, 고성, 사천 3성을 탈환

하였으며 무술 4월에는 안음의 적을 죽였으니 사람들은 공의 명성이 정기룡과 같았으나

어중(御衆)의 재(才)는 오히려 지나침이 있다.

낭이 평정된 뒤에 오위도총부 경력으로 특히 가리포첨사에 올랐고 을사 3월에

해랑적이 제주에 이르렀을 제, 또 화공책을 써서 적선을 사라지게 했다.

선조가 새서(璽書)를 내려 가장(嘉獎)하여 가선계(嘉善階)에 오르고 선무1등에

녹훈되고 순천부사에 제수되어 치적이 컸으므로 부민이 비를 세워 송덕하였고,

병오 여름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서 도총부 부총관을 겸임하였을 때 남에게

장복(章服)을 늘 빌렸으므로 도총관 서성이 그 청개(淸介)함을 연중(筵中)에 아뢰어

선조의 가탄(嘉嘆)을 입고 금세일단(錦細一段)을 하사받았고 당시

김성일 이순신 등도 공의 무공을 격찬하였다.

 

그 뒤 광해주의 미움을 입어 교동 별장으로 내 보내어 임해군을 죽이게 하였으나 그 무죄를

애석히 여겨 끝까지 잘 보호하였음으로 군소(群小)의 협박을 받고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광해주 역시 의롭게 여겨 충청도수사에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고 백공(伯公)과

함께 남으로 돌아왔다.뒤에 포도대장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칭탁하여 굳게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공은 평소에 간진(干進:벼슬을 바람ㅁ)을 기뻐하지 않아 비록 당로(當路)한

노 재상에게도 므릎을 꿇지 않고는 “무인이 되어서 배례를 알지 못합니다” 고

하였다.공은 명종 기미 2월 10일에 나서 56살을 1기로 하여 갑인 2월 16일에 몰하시니

광해주가 예관을 보내 치부(致賻)하고 또 지관으로 하여금 택지하여 안장케 하였으니

곧 구만 묘동 곤향원이다.

 

 

순조 병자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또 고종 신미에 의숙의 시호를 받았다.

배 정부인 의령남씨는 통정 세준의 딸이니 동영 쌍조였고 아들 명호(鳴虎)는

예반시주부요 사위는 강진선이요,명호의 아들 낙(洛)은 평구도 찰방이고

낙의 아들은 유석(由碩), 유방(由磅) 무과요, 유박(由薄). 유질(由礩)이다.

현손이하는 이루다 들지 않는다. 공의 몰 후에 국가의 포영(褒榮)과 사림의

숭앙으로 오도산 하에 입사(立祠)하여 형제 병향하였으나 신도비가 갖추어지지

못하여 주손 연웅(然雄)이 선적(先蹟) 문헌을 받들어 불영(不佞) 가원(家源)

에게 명을 청하였다.

 

씩씩하도다 의숙(義肅)이여, 나라의 영걸이로다. 일찍 경서(經書)를 익혀서

성철(聖哲)을 배웠으며 큰 뜻을 품었으니 때를 얻지 못하고 붓을 던져

활은 쥐니 그 기능 절륜하여 무시 갑과(武試甲科) 장원으로 이름을 떨쳤도다.

용사란(龍蛇亂)을 당하여 강토가 짓밟힐 때 강개심(慷槪心) 북받쳐 의(義)를

세워 일어섰소, 백공은 지략으로 계공은 전투에서 국치를 설원하니

세상 사람 이르기를 “ 쌍충(雙忠)” 이라 칭송하오.

상서로운 모습에 제비 턱을 하였으며 찢어진 눈초리에 활 솜씨가 능했으니

구만 골 첫 싸움에 오랑캐들 겁을 먹고 도망치기 바빳으며,진주, 사천,창원,

웅천 적을 쫓아 설멸하니 통솔과 전술의 재간에 짝할 사람 없다하오.

제주도 앞 바다에 해랑적 노략할 때 한 묶음 햇불로서 적의 함대 소탕하니

그 공적 가상한 특진 새서(璽書) 내렸도다.순천 고을 맡아서 인덕(仁德)으로

다스리니 백성들 칭송하여 돌에 새겨 전하더라. 장복(章服) 을 빌려입고

조정에 입조(入朝)하니 상께서 가탄(嘉嘆)하고 비단 1단(一段)을 하사하며

공의 청개(淸介)를 권장했소.

교동별장 출척된 후 무멸(誣衊)받는 임해군 보호하는 미움 사서 온갖 핍박 미쳤으나

개의 않고 물리쳤네. 어수선한 세상에 벼슬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속에

묻혀서 세상 떠나니 예관으로 하여금 조문케 하고 지관에게 명하여 명지가려

모셨는데 백년 세월 흘렀어도 사림 추모 이어지오.

전조(銓曹)의 벼슬과 의숙(義肅)의 시호가 내렸으니 예에 어긋남이 없도록

소대의 신도(神道)에 돌을 세우고 공의 충열 새겨서

영원히 전하노라.

 

광복후 40년 갑자 3월 일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李家源) 근찬

 

만대첨안대(萬代瞻仰臺) 

경남고성군구만면 광덕 의민.의숙신도비경내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