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민공소호최선생 신도비명(義敏公蘇湖崔先生 神道碑銘)
7. 비 명(碑銘)
1) 신도비(神道碑)
ㅇ 의민공소호최선생 신도비명(義敏公蘇湖崔先生 神道碑銘)
고성군 구만면 광덕리 광암 소재
조선 순조 병자에 경상도 관찰사 이존수(李存秀)의 장계에 의하여
동지중추부사 최균(崔均)에게 이조판서를 포증하였고
고종 신미에는 또 의민(義敏)의 시호가 내려졌다.
공의 자는 여평(汝平)이요 호는 소호(蘇湖)요,
그 선세는 전주이니 문하시중 문성공 아(阿)로 부터 고려,조선 양조에 현달하여
사복시정공 사필(斯泌)과개령현감공 자경(子涇)과 비안현감공 증 도승지 수지(水智)와
군수공 이식(以湜)에 이르기까지 4세가 모두 문과에 올랐으나 군수공은 공에게 고조였고,
증조 윤신(潤身)은 무과첨사요, 고조 담(潭)은 참봉 증 한성우윤이니, 처음 고성에 이거하였고
황고(皇考)운철(云哲)은 증 형조판서요 외조고는 참봉 청풍 김덕후(金德厚)이다.
이에 앞서 선고가 구만동 곤계봉 밑에 개기할 제 이승(異僧)이 이르기를
“내일에 철관동녀(鐵冠童女)가 나타날 테니 그 시에 상량을 한다면
반드시 두 기남(奇男)을 둘 것입니다.” 하였더니 다음날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는데
한 계집종이 비를 피하기 위해 잔치에 쓸 빈대떡을 굽는 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옴으로 어제의 일을 깨닫고 상량을 하였는데 과연 공과 아우 강(堈)을 낳았다.
이 후 사람들이 이 산을 일컬어 “곤계(昆季)” 라 불렀다. 공은 중종 정유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기상이 비범하고 자라서는 유행이 갖추었으며 만년에 역경(易經)을 깊이연구하여
소장화린(消長悔吝)의 상(象)과 천문,지리, 병농(天文,地理,兵農)에 이르기까지밝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임진의 난에 소계(蘇溪)가 창의할 것을 주장하자 공이“이것이 곧 나의 뜻이야,
내 비록 하나의 서생에 지나지 않으니 그대와 사생을 같이 하리라.” 하고
곧 자제와 가정(家丁)을 훈독하여 곤계봉 아래 독산(獨山)에 향병 수백을모집 하였다.
때에 적이 이미 구만동구에 들어와 크게 노략을 자행하여 나씨(羅氏)의 집을 점거하였을 제
급히 달려가 무찔렀다. 이로부터 군성(軍聲)이 크게떨쳐 피난하는 이들이모두 이에 운집하였고
표질(表姪) 이달(李達)이 또한 모병하여 서로 도왔다.이에 소계와 이달은 장수가 되고
공은 모주(謀主)가 되어 모든 군계(軍械:병기)를 주획하여소계는 진주 사천 창원으로 달려가고
공은 담티에 둔병하여 북으로 스며드는 적을 막았으니 이곳이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옷을 찢어 기치를 세우고 자호를 “풍운장” 이라 하여 크게 써서 가로에 걸어 의병(疑兵)을삼고
장사 수십인을 뽑아 궁시(弓矢)를 갖고 산곡(山谷)을 출몰하면서 적을 사살하고
소계는 공이 파견한 정병을 얻어 진해를 비롯하여 웅천의 안민령과 진주의 두골평에
이르기까지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소계는 담티에 돌아와 진세를 살펴보고
“우리 형님은 유자(儒者)임에도 불구하고 용병의 규모가 이렇다니” 하고
감탄하였고 초유사 김성일 역시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이내 곽재우,조종도,권응수 등으로 의각(犄角)의 세를 지어 군량이 결핍될 때는
반드시공에게 도움월 입업고 웅천의 책석투진(磔石投陳)과 창원 진해의 백사포로(白沙鋪路)는
모두공의 기략이었으며 을사년에 해량적이 제주에 침입하였을 때는 적벽 화공책을 써서
크게신용(神勇)을 떨치었다. 낭니 평정된 뒤 논공할 때 스스로 겸퇴(謙退)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대수장군(大樹將軍)에 비하였다. 드디어 통정계(通政階)에 오르고 선무 3등에 녹훈되었으나
관도에 나아갈 뜻이 적고 또 광해주의 정변을 당하여 소계와 함께 시를 읊어 뜻을 밝히고 남으로 돌아와
강호에 낙을 부쳤다.정미에 수로써 가선에 오르고 병진 9월 16일에 몰하니 춘추가 80이요.
현북(縣北) 당황에 자좌원에 안장하였다. 배 정부인 진양 정씨는 진사 관(寬)의 딸인니4남 2녀를 두었는데
남은 홍호.산호.기호와 김천찰방 진호요.여서(女壻)는 서순개와 봉사 이명원이요. 홍호의 남은 흡(洽)과
찰방 홍(洪)이요.진호의 자는 염(溓). 즙(濈). 욱(燠). 업(澲). 광(洸)이요. 증현 이하는 이루다 기록하지 않는다.
이제 공의 몰후 360여의 성상을 지나는 사이에 국가의 포영(褒榮)과 사림의 숭앙이 지극하였고
또 묘역이 청정하고 송지(松芝)가 무양하였으나 다만 신도의 궁비(穹碑)가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주손 덕환(德煥)이 쌍충실기를 받들어 불녕(不佞) 가원(家源)에게 명을 청하였다.
옛날 임진년에 섬 오랑캐 난을 꾸며 영남해안을 침범할 때 철성고을 소호선생 읽던 역서(易書) 덮어두고
분연히 일어서니 그 기상 충천했소. 무예에 뛰어난 계제 여견(季弟汝堅)과 함께 마을 장정 규합하여
창의 임전하였으니 백공은 모주(謀主)요 계공은 장수로다. 담티고개 진을 치고 군사를 매복한 후
풍운장 깃발 꽂아 사기를 진작하니노략하던 도적 떼가 도망치기 바쁘구나.
진주 창원 진해 웅천 적을 쫓아 무찔렀소.웅천의 책석전략 많은 군사를 구하였고
진해의 백사전술 적의 길목 차단했네.제주바다 해랑적은 화공으로 설멸하고
임기응변 신통술로 승전고 울렸는데 논공과책록에는 겸양하여 물러서니 그 충정 깊고 넓어
옛 사람에 비겼소. 뒤숭숭한 정변에나라 걱정하시면서 고향에 돌아와 자연을 벗을 삼고
팔순에도 강건하여 천수를 다하시니의민의 시호에 전충(詮忠)의 벼슬내려
소대의 옛 터에 돌을 세우고 국 한문 섞어서명을 새겨 전하노라.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李家源)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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