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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7.비명(碑銘)-1)신도비(神道碑)-의숙공 가리포해전 대첩비(大捷碑)-유허비

by choijooly 2024. 5. 4.

의숙공 가리포 해전대첩비(義肅公加里浦海戰大捷碑) 

 

7. 비 명(碑銘)

 

1) 신도비(神道碑)

ㅇ 의숙공 가리포 해전대첩비(義肅公加里浦海戰大捷碑)

 

최강 장군은 전주 최운철(崔云哲)의 아들로서 고성에서 1559년에 출생하였고

자를 여견, 호를 소계라 하였다. 158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음며 임진란이 일어나자

형 균과 함께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사천, 웅천, 진주, 영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임진란은 왜군의 패퇴로 끝났으나 전후에도 우리나라 서남해안에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유눈한 장군을 서남해의 진에 배치하여 왜구에 대비

하고자 하였는데 이 때 최강 장군이 발탁되어 가리포 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605년 6월 8일 왜구의 대군이 제주 근해로부터 완도 앞바다에서 석장포 왜등에

침입하려 하였다. 이에 장군은 석장포에 군졸을 매복시키고 왜선단을 전멸시키고자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다음날 수군을 인솔하여 적을 석장포로 유인하여 수십 척의

화공 선을 적선에 추돌시켜 이를 소각하였고 허둥대는 왜병은 매복중이던 우리 군에

소탕되었다. 그리고 간신히 석장포에서 빠져 달아난 왜선을 최강 장군은 멀리 장수도

(障水島)까지 추격하여 나포하는데 대 전과를 거두었다.이 이후로는 이 고장에 왜구의

해적행위는 근절 되었다고 한다.

 

최강 장군은 이 전공으로 선무원종 1등 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로 승계 순천부사로

영전하였고, 이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와 오위도 총부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광해조에 이르러 충청도 수군절도사와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낙향하여 유유자적하다가 1614년 2월 16일에 졸하니 조정에서는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의숙의 시호를 내렸다.

 

서기 1993년 3월 30일 완도군수 문병일

 

※ 가리포 백성들이 공의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는데 일제(日帝)의 만행으로 강제

훼손되어 버렸으므로 오늘 청덥비 복원 건립을 위하여 최강 장군 청덕비 건립협의회를

구성하고 유관기관과 협의후 국. 도. 군비 및 후손 성금을 합해서 1993년 3월 30일

이 대첩비를 세웠다.

 

※ 의숙공의 가리포 해전 대첩이 이루어졌던 전적지들이 대첩으로 인하여 새로운

지명으로승화되어 지금도 “넉구지”, “왯등”, “목왜난골”.왜난목“,”왜랭이“. ”석전포“

등으로 구전되고 있다.(청해문화 창간호 1993년)

 

ㅇ 의숙공 유허비(義肅公遺墟碑)

의숙공 유허비(義肅公遺墟碑) 

 

공의 휘는 강(堈)이요, 자는 여견(汝堅)이며 호는 소계(蘇溪)이다

성은 최씨이고 본관은 전주이며 고려 문하시중인 시(諡) 문성공 아(阿)의 후손으로서

조선 조 명종 14년 기미에 출생하였다.

본래 타고난 성품이 뛰어났으며, 또 영민하고 준수한 인물로서 대대로 집안에 충절과

효성이 전하여 왔다. 용력과 지략이 탁월하고 생긴 모습이 호방하여 시원시원 하였다.

어릴 때부터 학문과 기예를 깨닫기 시작하고 경학(經學)에 밝았다.늘 병학(兵學)을

읽으면서 공명에 Emtd이 있었기 때문에 반초(班超)가 붓을 던진 것을 흠모하였고,

무술을 익혀서 무과에 급제하여 뜻을 이루었으니 기개와 절조가 더욱 강해졌다.

 

불의에 섬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잔인하게 침범하여 오자 형제분이 마음과 힘을 합하여

충절로서 의병을 모집하였더니 용맹있는 군졸들이 두 형제분의 휘하에 몰려들었다.

칼을 듥고 군사를 일으켜서 함락된 진양성을 구하고 웅천에서는 왜놈을 궤멸시켜 크게

승리하였으며 평소태 장수를 사로잡고 3성을 모두 회복하였다.나라에서 크게 기뻐하여

1등 공을 세웠다고 칭찬을 하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의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가리포 첨사로 이동시키면서 관직을 더 높혀 주었다.절도사를 두 번 지내고

아장에 올랐으니, 이것이 다 상감의 마음에서 우러난 상이요. 그 시대에 명망이 높았

으므로 순조대왕이 또 높은 벼슬을 내렸다.이제 또 성주(聖主)께서 시호를 추증하였으므로

이것은 한 때의 영광이요 100대의 광명이로다.삼가 경건한 마음으로 아뢰면서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올린다.

고 문헌공(文憲公) 성재(性齎) 허전(許傳)께서 지은 바이다.

 

7년간 전쟁에서 중흥의 공을 세운 것은오로지 여러 도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마땅한

힘이며,그 때 소계 최공이 그 중의 한 사람이 었다고 의정부 영의정 김병학께서

지은 바이다. 대개 공의 거룩한 훈공과 씩씩하고 열렬함은 국조기사, 명장록. 중흥지.

그리고 여러 선비들의 문집에 널리 기록되어있으니 공을 가히 알 것이다.

여기 부산직할시 남구 수영동은 선조 39년에 수군절도사였던 소계공의 영지(令地)인데

비록 오래 되기는 하였은나 후손이 아직도 잊지 않고 근심 하는 바 컸다.이에 불초

정온(正蘊)이 여러 일가들과 더불어몇해를 두고 잘 의논하여 유적은 밝힐 것을 도모

하였으나 일은 크고, 힘은 모자라서 이 어른의 사적이 거의 묻혀서 전하지 못할까

하였는데 다행이 종중 의논이 모아져서 모두 성의를 다하여 돈을 모아 돌을 깎고

비를 세우니, 슬프다. 이 일을 이때에 하지 않고 어느 때에 한단 말인가 ?

하물며 멀고 가까운 선비들이 서로 나라에 호소하여 추모함이 이와 같이

정중하니 충성의 바른 길이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도다.

훗날 사람들로 하여금 이에 대하여 보고 느낀 것이

또한 감동되어 일어날 것이다.

 

서기 1985년 (단기4318년) 을축 1월 일

주손 연웅(然雄)

감역 후손 상호(尙鎬)

감역 종후손 원호(元鎬)

수영유림양명환(梁命換) 이흥준(李興俊)

박재숙(朴載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