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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7.비명(碑銘)-1)신도비(神道碑)-의숙공 전적비(義肅公戰跡碑)

by choijooly 2024. 5. 4.

의숙공 전적비(義肅公戰跡碑) 

 

7. 비 명(碑銘)

 

1) 신도비(神道碑)

 

ㅇ 의숙공 전적비(義肅公戰跡碑)

진주시 옥봉남동 디베리 소재(晉州市玉峰洞디베리所在))

공의 관(貫)은 전주요. 성은 초씨. 이름은 강(堈)이며,

자(字)는 여견(汝堅)이요.호는 소계(蘇溪)라 한다.

고려 문화시중 문성공 아(阿)의 후손으로 이조 명종 14년에 나시니 미간(眉間)이 넓고

이마가 시원스러워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났다.자라면서 풍채가 준수하고

용맹이 뛰어나니 사람들이 장하고 크게 될 것을 기약하였다.

 

공이 투필시(投筆詩)를 지었으니

“큰 웃음 한번하고 붓 던져 일어나니 천지가 활 시울인양 이렇게도 가볍구나

(大小投筆起天地 一弦輕)“ 하였으니 그 기상이 이와 같다.

27살에 무과 장원으로 훈련원 봉사(奉事)에 뽑혔으나 평소 절개를

숭상하였기에 나아가지 아니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백형(蘇溪公)과 더불어 몸을 던져

의병을 일으키니 여러 장졸들이 따라온 자 많았었다.,두 생질인 양산군수 이공 달(李公達)과

초계군수 안공 신갑(安公信甲)이 또한 이에 따랐다. 때에 이미 왜적들은 고성 구만동 어귀에

다가 왔으므로 공이 이를 맞아 무찌르니 시냇물이 다 붉게 흐르고 의병의 사기는 크게 떨쳤다.

학봉 김선생이 영남 초유사로 내려와서 공의 형제의 영명(英名)을 듣고 크게 촉망하여 중임을

맡기니 공은 드디어 조 충의공 종도(宗道)와이 정의공 노(魯)와 곽 충의공 재우(再祐)와

충주목사 이공 정(瀞)과 같이 왜적 토벌을 맹세하였다. 5월에 적이 진양성을 범하니

공은 김충민공 시민(時敏)과 함께 적을 쳐 물리쳤다.

얼마 뒤에 진양성의 허함을 엿보고 다시 쳐들어옴으로 공운 군수 이공(達),곤양군수

이공(光岳)과 더불어 창원 진해로 오는 적을 협격하니 적들은 낭패하여 밤에 도망하였다.

8월에 적이 다시 진해 고성을 함락하고 사천에 둔을 쳐, 장차 진양성을 엿보려 하므로

공이 김 충민공 시민(時 敏)과 함께 대둔령을 넘어 들어가니 적이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할 때 공은 적이 몰려나올 요로에 잠복하여 밤에 도망함을 기다려 드디어 날쌔게

쳐부수었다. 적이 크게 패하여 진해에 있던 병력과 합세하여 도망하는 것을 쫓아가

적장(平小太)을 사로자고 진주, 고성, 사천등 3성을 회복하였다.

10월에 또 진양성을 쳐들어와 10겹으로 둘러쌓이니 공은 군수 이공 달과 주부

정공(惟敬)과 참의 조공 응도와 함께 달려가 구원할 제 밤에 만진산에 올라가 군사로

하여금 한 사람이 4~5개씩 횃불을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북치는 소리가 온 골짝을

떨치니 적은 놀라 군막을 사라버리고 달아 났다.

 

계사 6월에 왜적이 또 30만 대군으로 동래로부터 직행하여 마침내진양성을 함락할 때

공은 군수 이공 달과 구원하려 왔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두골평으로 돌아오니 적이

쫓아와 둘러사거늘 공이 만중의 사이로 돌격하여 풀베듯이 베니

적군이 쓰러져 물러감을 봉사(奉事) 한공 계(誡)가 바라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천고에 이 같은 용장이 어디 있겠는가 “ 다만 중책을 맡기지 않았음이 아까울 따름이다.”

라고 하였다. 9월에 적이갑자기 김해로부터 웅천 안민령으로 들어와 남도에 모인 장군들이

포위되었을 때,공은 적진에 돌을 던져 군심을 어지럽게 한 뒤

말을 달려 한쪽을 무너뜨리고 장군들을 살려 내였다.

 

김 충장공 덕령(德齡)으로 부터 공의 용맹을 듣고 별장으로 승진시키니

공은 충무공 이순신과 호응하여 웅천 사량의 적을 물리쳤다. 충무공이 백천 응황(白川應璜)에게

주는 편지에「다행이 최 별장 균, 강 형제의 힘을 입어 웅천 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또 왜구의 장수를 무찌르니 어찌 마음이 쾌하지 않으랴 ?」 하였다.

 

공이 또 권 충의공 응수와 정 강의공 세아와 더불어 영천의 적을 화공으로 무찌르니 타는

냄새가 사방에서 코를 찔렀다. 난리가 평정되니 나라에서 그 공훈을 높혀 가리포첨사로

특진시켰다. 을사 3월에 왜적이 또 큰 배들로 바다를 덮어 제주를 거쳐 들어오니 모든

고을이 풍미하여 감히 항거치 못할 적에 공이 백형의 지모를 얻어 잠깐동안 적의 배

수십척을 불 태우니 적군은 불에 그을리고 물에 빠진 자 헤아릴 수 없었다.

이는 곳 영천전의 전법을 쓴 것이다. 싸움의 이김을 듣고 나라에서 특별포상으로 녹훈

1등과 가선대부 순천부사를 내리니 백성들은 송덕비를 새워 흠모하였다. 병오년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벼슬에 올랐으나 광해군 때 참소를 받아 교동별장으로 직분이

깍이고 임해군을 죽이라 하거늘 공은 “ 내 죽음을 당할지언정 차마 죄없는 왕자를

죽이지 못하겠노라.“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놓아주고 충청수사를 주었으나 공은 정사의

어지러움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백형과 함께 전원으로 돌아와 은거 했다.

 

그 뒤로 포도대장으로 불렀으나 칭병하고 나가지 않았다. 갑인 2월16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56이시다.광해군이 부음을 듣고 통탄하여 제문을 지어 제사 지내고 지관을 보내어

장사 지냈다.순조 병자에 예조판서의 상주에 따라 공의 형제를 판서에 증직하고 시호를

의민. 의숙으로 내리니 사람들이 흠모하여 도산서원에 모셨다.

 

대개 공의 장렬한 위훈은 이미 국조기사 조야회동, 명장록, 중흥지.시장등으로 다 볼수

있으나 오직 진양성 전적으로 입엇던 모진 상처는 산과 들의 형국을 바꾸니 뒷날

이 사실을 인멸될까 두려워 불초 정온(正蘊)이 족제 진모(震模)와 더불어 제족들과

의논하여 돈을 모으고 돌을 깎아 지난 자취를 표하고자 그 대략을 간추려 쓴 것이다.

 

방후손 재호(載浩) 옮기고 김해후인 김도용(金道用) 씀

수비일자(竪碑日字) 중원 을묘 4월 15 일(단기4308년 음력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