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당공 사적비(竹塘公 事蹟碑)
7. 비 명(碑銘)
1) 신도비(神道碑)ㅇ죽당공 최선생사적비(竹塘公崔先生 事蹟碑)
국가에 큰 사련이 닥치려 하면 하늘은 먼저 훌륭한 안물울 내어 이를 극복하도록
하는 바 죽당 최선생이야 말로 그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억류되어 있을 때 선생은 익찬의
직책으로 모시고 가서 잘 봉위하여 무양(無恙)히 돌아오게 하는데 큰 공로가
있었고, 그 뒤 국가의 기밀문서를 갖고 청에 가서 전대(專對)를 잘 했기 때문이다.
선생의 휘는 탁(濯), 자는 극수(克修), 죽당(竹塘)은 그 호이다. 성은 최씨로
관향은 전주인데 시조느느 고려조 문하시중 문성공 초아(崔阿)이다.
이 후 잠조(簪祖)가 환혁(煥赫)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최효량(崔孝良)은
형조참판에 추증되었는데 비로소 진주로 이거하였다. 그의 현손 군수공
최기변(崔琦抃)은 곧 선생의 황고(皇考)이다. 황비(皇妣)는 용궁김씨로 부사용
(副司勇) 포(抛)의 따님이다.선생은 선조 31년 무술(1598) 4월 11일에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자가 영이하여 기량이 광중하였고 문학이 숙성(夙成)
하였다. 일찍 군동(群童)들과 백이, 숙제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한 아이가
“그렇게도 기롭게 살것 있어” 라고 말하자 선생은 정색하고서 “ 두 분 덕으로
강상이 부식(扶植)되어 금수를 면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질책하고 다시는
놀지 않았다. 어른들이 듣고서 원대한 인물이 될 것으로 기망(期望)하였다.
약관(弱冠) 이전에 외간(外艱)을 당하였는데 수제애훼(守制哀毁)함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모부인에게 효양을 극진히 하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의 권유로 무과 준비를 하던중 상을 당하였는데
전상(前喪)보다 더 극진히 거상하였다.
상결(喪闋) 후 경오(1630)년에 무과에 올랐다. 선생의 학문과 재덕은 당시
서반(西班)에서 으뜸이었으므로 계유년에 선전관에 제수되었고 비국랑(備局郞)
을 겸하였다. 병자년에 광양 현감으로 나갔는데 겨울에 후금(後金)이 갑자기
침략해 오자 즉시 모병하여 근왕(勤王)하려고 했다.화의의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 사관귀은 (辭官歸隱)하려 하였으나 이민(吏民)들의 만류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위정(爲政)이 청평염근(淸平廉謹)하니 백성들이 왜구를
구실로 또 만류하여 1년 더 머물렀다. 이임 후 읍민들들은 입비송덕(立碑
頌德)하였다. 계유년에 형조좌랑으로 옮겼는데 판서가 인재로 여겨 업무를
다 맡겼다.선생은 물 흐르듯이 일을 처리해 내니 동료들이 모두 추복하였다.
난리후 세자와 대군이 심양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문무 겸비하고
덕행을 갖춘 인물로 세자를 모시는 관원으로 임명하려 하였다.
이에 선생을 익찬으로 삼아 시종하도록 하니 세자와 대군이 크게 의지하였다.
청나라에 있는 동안에 와신상담의 정신으로 월나라 구천이 강한 오나라에
설치(雪恥)한 사실(史實)을 들어 세자나 대군을 넌저시 깨우쳤다. 대군은
선생과 일을 논하면서 칭탄하기를 “ 우리나라에 그대 같은 인재 2~3명만
있었더라도 여기까지 오게 되었갰소?“ 라고 했다.
선생을 인재로 여겨 중시함이 이러하였다..심양에서 돌아와서는 “오랑캐에서
설치(雪恥)하지 못했으니 출사할 수 없다“ 고 생각하여 기관(棄官)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거제 부사로 불렀으나 불부(不赴)하자 다시 죽산부사로
부르므로 부득이 부임하였다.
이 때 명은 이미 망했는데 선생은 관아 벽에다 오랑캐를 무찌르지 못하여
부끄럽다는 내용의 시를 써서 뜻을 표명하였다. 반 개월 뒤에 사관하고
속리산에 들어가 평생을 마칠 계획을 했다. 그 때 조정에서 선생에게 청에
사신으로 가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앞서 세자가 돌아 온 것을 진사하기
위해서 인평대군이 출발하였다.당시 일본이 꾸미는 기사(機事)가 매우 긴박
하였으므로 대군의 행차보다 앞서 도착해야만 했다. 질치(疾馳) 할 힘과
청제를 독대하여 나라를 욕되게 하지 않을 능력이 있는 인물이 아니면
사명을 맡길 수 없었다.
세자가 선생을 추천하자 인조도 “과인도 그 사람을 안다.“ 라고 말하고는
사명을 맡겼다. 선생은 “청에 칭신(稱臣)한 문서를 갖고 가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아뢰며 체읍(涕泣)했지만 사기(事機)가 매우 급박했으므로 도리가 없었다.
인조는“이번 사행(使行)은 돌아올 기약이 없는 듯하오.”라고 위면(慰勉)했는데
선생의 충정으로 볼 때 반드시 청에 굴욕을 당하려 하지 않을 것임을 감지
했기 때문이다.선생은 주야로 달려가다가 도중에 병발했지만 쉬지 않았다.
결국 북경에 먼저 도착하였다. 청제를 접견할 때 진지(進止)가 단상(端祥世))하고
주대(奏對)가 개절(凱切)하였다. 청의 어떤 고관이 알아보고서 “ 저 사람은 바로
최익찬이구나. 군자인 것은 본디부터 알고 있었는데과연 그렇구나.“ 라고 했다.
그 때 오랑캐 한명이 멀리서 고함을 치면서 선생을 해치려고 달려들자 선생은
정색을 하여“ 필부로서 제후를 형혹(熒惑)하게 하는 자는 복주(伏誅)를 당한다.
옛날에도 중국이 이러했던가 ?“라고 질책하였다. 선생은 이미 생사를 초월
했기에 이렇게 의연할 수 있었다. 이 면대(面對)에서 10수차말이 오갔으나
선생은 신(臣)이라는 칭호를 쓴 적이 없었다.
청제는 선생의 의견을 따라 그 오랑캐를 목 베고 회자(回咨)를 만들어 주었다.
객관에 돌아오자 병이 더욱 위독하게 되니 자손을 훈계하는 글을 역관(譯官)에게
전하도록 했는데 “영구(靈柩)가 돌아가면 오랑캐 천을 버리고 다시 염을 하고
명정에는 반드시 을해년 이전의 관함(官銜)을 쓰라“는 내용이 었다.
운명 직전에 좌우에 명하여 부기(扶起)하도록 하여의관을 정제하여 동향을
4배하고 서거하니 을유(1645)년 5월 28일이 었는데 향년 겨우 48이였다.
부출(赴 出)하자 왕은 매우 애통해 하며 의주 부윤에게 영구가 돌아오면 관을
새로 바꾸어 염을 새로 하게하고연도의 감사와 수령들에게 치전(致奠)하며
호송하도록 했다. 특별히 좌승지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어 하동군 호사역
(虎사驛) 신좌의 언덕의 묘지를 택정하였으니,실로 광세(曠世)의 이악(異渥)이었다.
선생은 인품이 관후하고 기상이 화평하여 평생에 질언거색(疾言遽色)이 없었고
동정어묵(動靜語默)이 다 절도에 어김이 없었다.시비가 안으로 분명하였고
규각(圭角)이 밖으로 노출되지않았다. 무과 출신이면서도 유학을 혹애(酷愛)하며
입지행기(立志行己)함에 법도가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로는늘 울분을 품고 있었는데
독록편(獨鹿編)을 읽다가 엄권체읍(掩卷涕泣)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자호란 이후에 관함을 일컫는 이가 있으면 “난후 출사는 내 뜻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제지시켰다. 선생의 도의지교로는 겸재 하홍도. 낙와 하홍달. 동계 권도.
한사 강대수 같은 분들이 있는데 더불어 강학논도(講學論道) 하였다.
아아 !! 선생은 한 평생 일자(一疵)도 없었고
그 재기와 지절은 국왕도 알고 있었다.
선생이 귀국하면 인조는 대용(大用)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하늘이 그 수명을
주는데 인색하여 마침내 선생으로 하여금 그 덕에 맞는 직위를 얻어 뜻을 행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으니 후인으로 하여금 개탄을 불금케 한다.
선생은 사행(使行) 도중에 병발하여 타국에서 고복했는데 이는 우국충정에
울분 때문인바, 화이 후 자결을 시도한 분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할수있다.
숙종 경인(1710)년에 사림에서 인천서원을 세워 향사하고 있다.
유고는 화재로 다 민멸되고 말았고 다만 후손들이 편찬한 실기 1권에 있다.
조정에서 선생에게 포증을 하고 사림에서 향사에 오고 있으니 선생의 국가에
대한 공헌과 학문적 조예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또 지식인으로서 국가
민족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전범(典範)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세대가 멀어짐에 그 의적(懿蹟)이 인멸될까 저어한 후손들이 성력을 결집하여
탄생지에다 사적비를 건립하여 천추에 전승되기를 도모하였다.
돌이 갖추어졌을 제 후손 낙일(洛一) 영범(榮凡) 규항(圭抗)이 불초에게 청문해
왔다. 불감당의 뜻을 표하였으나 불획하여 자료를 고열(考閱)하여
비문을 짓고 끝에 명을 붙인다.
그 충효는 탁절(卓絶)했고 문고 무를 겸전했네.북지(北地) 심양 풍설속에
우리세자 인질신세 그 누구랴 ? 호위할 이 선생밖에 또 있으랴 ?
외교관계 긴박할 제 욕됨 없이 극복했네. 국긍진췌(鞠躬盡瘁) 사이후기
(死而後己) 이역에서 순국했네.조정에서 포증하고
사림에서 향사하니 그 훈공과 그 학덕은 조야 모두 인정한 것.
극사광음(隙駟光陰) 흘러가면 의적(懿蹟)
일실(佚失)되니, 후손들이 성력모아 우뚝한 비 세운다오.
사적모아 새겼으니 남자(覽者) 모두 기경(起敬)하리.
경진(2000년)초춘(初春) 망일(望日)에 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중국화중사범대학 겸직교수 김해 허권수(許捲秀)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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