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안정 유허비(九印亭遺墟碑)
7. 비 명(碑銘)
1) 신도비(神道碑)ㅇ 구안정 유허비(九印亭遺墟碑)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斗陽里)에 있다. 전주인 판관공 최기연(崔琦衍),
군수공 기변(琦抃),판관공 기필(琦弼) 부사공 기준(琦準). 군수공 설(渫),
현감공 호(滬). 부사공 탁(濯) 별제공 수(洙) 영장공(營將公) 혼(渾) 등 9명이
인관(印官)을 차고 여기에서 유식(遊息)하던 곳인데 후손이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였다.(진양속지)
ㅇ하마비(下馬碑)
구안정 유허비(九印亭遺墟碑)
이 비는 옛 인천서원 앞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훼철된 이후 비가 방치된 것을
경현당(景 賢堂) 유계(儒稧)에서 개수하였다. 구비(舊碑)도 병립되어 있다.
이 하마비 사실기(下馬碑事實記)에는 『이곳에 초라한 형태로 방치되어 있는
죽당(竹塘) 선생을 모신 인천서원이 남포동에 건립되어 있을때에 대로변에
세워져 있었으나 대원군 령에 의하여 서원이 훼철되고 하마비만 남아 있어서
금번에 영구 보존하기 위하여 택지(擇地) 건립하고 유래 시설을 기롯한다.
인천서원은 현재 서황리(西黃里) 중촌 부락에 복원되어
매년 향사를 드리고있다.,』라 하였다.
ㅇ 진사전주최공 운 영세불망비(進士全州崔公澐永世不忘碑)
진사전주최공 운영세불방비(進士全州崔公澐永世不忘碑)
이 세상에 덕과 공을 세우면 사책(史冊)에 수록되고 금석문(金石文)을 새겨
후세에 전함은 옛 사람의 상례라 주남(州南) 본면(本面)은 마을이 빈곤하고
부역은 번잡하니 주민이 흩어져서 양속(良俗)이 폐퇴하고 교화(敎化)가 해이
하여 고향을 떠나 방황하여 생계가 막연하였다.
진사공은 명문화벌로서 깊은 식견이 있음에도 관로를 버리고 오직 면민을 위하여
친선계(親善稧)를 마련하여 선을 베풂을 낙으로 하였다.
사람을 사랑함을 흔쾌히 여겼고 사재를 희사하여 농토와 수리를 개척하였으며
가혹한 부역을 막고 세금을 대납하였다. 양식을 분배하여 굶주린 주민을 구제
하였고 면민의 집회 때에는 그 비용을 전담하는 등 규휼 사업을 한 지가 여러
해이며 향악을 규정하고 횡포를 배제하여 민심을 너그럽게 하니 이면(里 面 )의
안도(安堵)는 진사의 은덕이라 하고 여론이 감격하여 이 사적을 전하기 위하여
이 영세 불망비를 세우는 바이다.
진사의 이름은 운(澐)이니 전주인이라 효행과 또 인자한 행의로서 선사산(善士山)
아래 청강정사(靑岡精舍)에 은거하였다. 명하노니 아름답다. 군자여 ! 화기롭구나,
명성이여 ! 오막살이 빈민까지 은의로서 비호하니 봄풀에 미풍처럼 민심이
순화하네. 일 면(面)이 송덕하니 사방으로 퍼지구나. 새긴 글자 마멸되어도
그 이름 영원히 남으리라.
상지(上之) 10년 (1918) 무오 3월 하순에 개천리 중(介川里中)에 세움.
옛날 면민이 공을 위하여 비를 세웠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각자(刻字)가 많이
훼멸된 고로 방예손(傍裔孫) 영완(永完)이 고증하여 판독하고 아울러 번역함.
1989 년 4 월에 개수함
(주1) 진사공 최운(崔澐):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구현공 최상갑(崔祥甲)의 자
(주2)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옥천사입구 도로변에 개천면민이 공을 위하여
자연석에 각자하여 비를 세웠으나 세월이 오래되니 각자 훼멸로 판독이
어려운 것을 방예손(傍裔孫)인 구당공 영완(求堂公泳完)이 고증하여 판독
국역한 것을 후손들의 성력으로 이 자리에 1989년 4월 일에 오석(烏石)
으로 개비하고 구비(자연석비)는 그 곁에 나란히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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