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주요인물(主要人物)
4) 유행(儒行)
ㅇ 정호(廷虎 13世)
자는 성숙(成叔)이며 호는 모재(慕齋)이다. 공은 한성 우윤공 최담(崔潭)의
증손이고 군자감 f\판관으로 임진왜란 때 전사한 최훈의 아들이다.
공은 5살 때 왜란을 만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부친 또한 전쟁에서 전사하니
늙은 여자 하인과 산중에 숨어 있다가 적에게 사로 잡혔는데, 여자 하인이 감싸안고
애원하여(주: 南孫)은 죽고 공은 살아날 수 있었다.의숙공이 마침 적을 추격하다가
산에 이르러 공을 발견하고 군중의 막사에서 양육하였다.
조금 성장하여 학문을 하게 되자 재주와 생각이 영민하여 의숙공이 널리 서책을
구해다가 익히게 하였는데 장성해서는 노파 이흘(蘆坡李屹),부성여신(浮査成汝信)의
문하를 왕래하여 의문나는 점을 물었으며 남명 조식(南冥曺植) 선생의 문하에서
의를 존중하는 학풍이 전수된다는 말을 듣고 두루 방문하였고 마을의 어른들과
의문점을 토론하여 견문을 넓혔다.또 휴옹 심광세(休翁心光世)에게 태극 동정의
오묘한 이치와 인물성동이론을지어 여러번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일찍 월계(月溪)의 산수를 사랑하여 서실을 짓고 그 곳에 사니 심광세선생이
이름을 모재(慕齋)라고 지어주었는데공은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함이 있다는 뜻이다.
당숙(의숙공)을 섬김이 부친을 섬기는 것과 같았고 당숙의 상을 당하자 예를 갖추어
아려울 때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하였다.,1621년 광해 신유에 향년 34로 조서하니
휴옹이 제문에서
"언론이 뛰어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 기상은 속인들이 따를수 없으며
배움에 정성을 다하고 선(善)을 좋아하는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구나.“ 고 하였다.
명사들과 서로 주고 받은 시문과 유집 한건이 있다.(환여승람.고성지)
O 욱(澳 14世)
자는 박이(薄而)이고 훈신 최균공의 후이다. 문학과 효우가 뛰어나서 사우들이
추중하였다.(환여승람)
(주) 최욱(崔澳 ) : 찰방공 최진호의 자
O 동일(東逸 16世)
자는 자관(子貫)이고 호는 성경재(誠敬齋)이며 죽당공 최탁(崔濯)의 후손인 절충
장군 최재원(崔載元)의 아들이다. 품행이 말고 부지런하며경학에 정통하였다.
영조 50년 갑인년(1774)에 학문과 행의로 희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진양속지. 세헌록
O 동욱(東旭 16世)
자는 군경(軍擎)이고 호는 경암(景庵)이며 죽당공 최탁(崔濯)의 현손이다
학문과 올바른 품행으로 세인으로부터 추앙 받았다.(세헌록)
O 세대(世大 16世)
자는 경부(敬夫)이고 효는 은계(隱溪)이다. 참봉공 최하의 후인 통정공 최신생
(崔信生)의 손이다.도량이 있고 문학과 덕행을 고루 갖추었으나 큰 명망을 바라지
않은채 임천(林泉)에서 생을 마쳤다. 가선이 증직 되었다.(환여승람)
O 대악(大岳 17世)
자는 필언(必彦)이고 호는 겸재(謙齋)이다. 유일 최가산공(崔巨山公)의 후이고
가선공(嘉善公) 최석치(崔錫齒)의 자이다.천성이 순후하고 범인과
다른 특별한 모습을 지녔으며,등에 임자(壬字) 3개의 점이 있고 지극한 선행과
문장으로 명성이 들 났으며 100살의 장수를 누리니 승정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고 3대가 추증되니 고(考)최석치공(崔錫齒公)은 증 가선대부이고 조고최현례공
(崔顯禮公)은 증 통정대부이며 증 고조 최담생공(崔淡生公)은 증 통훈 대부이다.
O 석오(錫五 17世)
자는 현서(玄瑞)이고 호는 해연(海淵)이다. 문학으로 모든 사람들이 중망하였다.(향교지)
(주) 최석오(崔錫五) : 의숙공 최강의 후이고 죽성헌공 최유박(崔由薄)의 손
O 수전(壽全 17世)
자는 명초(命初)이며 호는 무이헌(武夷軒)이다.일생을 오로지 주지학을 연구하는데만
전념하고 과거같은 것에는 뜻이 없었다. 전원에 묻혀없눈듯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세헌록)
(주) 최수전(崔壽全):통덕랑공 최흥호의 후이고 평구도 찰발공 최홍(崔洪)의증손
O 익대(益大 18세)
자는 겸수(謙叟)이고 호는 산포(山圃)이다. 고은 찰방공 최진호의 5세손이며
영모재공 최진추의 손이고 동교동 최응회(崔應會)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자질과 성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훌륭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6살에 부친을 잃고 통곡을 하며 시신을 모신 관 곁을 따나지 않았다.
막내 숙부를 침부모처럼 섬겨 일을 할 때는ㅇ 반드시 아뢴 다음에 행하였다.
대산(大山)이 선생 문하에서 교유하였^으며 책상위에는 소학을 펼쳐놓고 자신을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평소에 중용이나 대학등늬 책을 읽는데 더욱 힘을 썼다.
아우 최붕대공(崔鵬大公)과 우애가 돈독하여 한방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화목하였다.
영모재와 흥학재를 짓는데 여러 종제들과 함께 힘을 썼다.지산(遲山)에 살면서
소나무와 대 나무를 심어 놓고 저녁 나절의 한가한 정취에서 뜻을 따 스스로
호를 산포(山圃)로 하였으니 산포악장(山圃樂章)의 여러 시는 모두 읊조릴 만한
것들이다. 청광에 별장을 지어 경추당(景楸堂)이라고 하였는데사적이 읍지에 등재
되어 있으며 사림(士林)이 취산사(鷲山祠)를 건립하였으나 나라에서 금하여
철거 하였다.(진양속지. 고성지)
O 지대(至大 18世)
자는 사용(士容)이고 호는 無憂齋이다.훈신 최균공의 후이다.
효우와 학문이 향리 사우들의 본보기가 되어 모두 경모하였다.
관동유록(關東遊錄)이 있다.(환여승람)
(주) 최지대(崔至大) ; 찰방공 최진호의 5세손이고 만회공(晩悔公) 최즙(崔濈)의 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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