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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 주요인물(主要人物) -4) 유행(儒行) -[3]

by choijooly 2024. 5. 10.

 

8. 주요인물(主要人物)

4) 유행(儒行)


ㅇ식민(植民 19)

자는 순호(舜皥)이며 호는 귤하(橘下) 또는 성와(省窩)이다. 공은 모산공

최기필(崔琦弼)8세손이고 최중길공(崔重吉公); 아들이다.

공은 설품이 너그럽고기국이 크고 깊었다. 공은 어려서 부터 남다른품성이

있어 부모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때마다 기억하여 잊지 않았다. 자라서는

과거 공부에 전념하여 재능을 인정받아 서울에 갔는데 요직에 있던 친척이

공에게 말하기를 당로(當路)에 부탁하지 않는다면 영달하지 못할 것이다.”

라 하였더니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책 한권을 잡고서 말하기를

즐거움이 여기에 있다.” 라 하였다.

 

어머니께서 병이들어 잉어를 드시고 싶어했는데 잉어를 구할수 없어 드

리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은 종신토록 잉오를 먹지 않았다.아우를 매우 사랑

하여 반드시 올바른 도로 인도해 주었는데 자신의 별당에는 ()”이라

쓰고 아우의 별당에서는 ()“이라 써 놓고 서로의 부족한 점을 연마하는

것으로 삼았다. 그리고 아우 숙민공(琡民公)에게 말하기를 집안의 일은

내가 다 처리할터이니 너는 사방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라 하였다.

그리하여 공의 아우도 형의 은혜에 힘입어 훌륭한 선비가 되었다.집안에 거처할 때는

두터운 은혜가 두루 미쳐서 명령을 하지 않고도 수족처럼 하인을 부릴수 있었으며

남을 대할 때는 노소를 불문하고 오만하게 대하지 않았다.또 재능에 따라

반드시 힘써 매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라하여 덕이 있고 어진사람들은 공을 사랑하였고 어리석은 자식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공을 본 받도록 하였다.(진양속지)

 

()최식민(崔 植民) :모산공최기필(崔琦弼)의 후이고 최주진공(崔柱震公)의 증손

 

ㅇ상운(祥雲 20

자는 양보(揚甫)이며 호는 수오당(守吾堂)이다.공은 찰방공최진호의 7세손이며

영모재공 최진추위 현손이고 미암공(美岩公) 최규환(崔奎煥)의 아들이다.

처음에 미암공은 의리로서 자식을 교육하였고 그 형 치암공은 학문과 도리로서

후손을 이끌었는데 공은 부형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성취한 덕과 도량이 본래부터

남과 달랐다. 또 입재(立齋) 선생과 강고(江皐) 선생과의 문하에서 유학하며

학문을 하는 방법을 듣게 되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였고 어려서 금수나 초목의 이름,

일월 성신의 질서, 바람, 서리, , 이슬의 변화에서부터 신체기관이나

찬척관계의 계보에 이르기가지 반드시 살펴서 물어보고 상세히 기억해 두었다,

그러므로 학업을 시작한 뒤에 글자의 획이나 음운이 마치 익숙한 사람과 같이

스승의 가르침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일찍 시경의 연어(鳶魚)의 시를

읊조리며 말하기를 이치로 본다면 천지의 모든 것이 다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연스럽게 날고 뛰노는 이치가 어찌 물고기와 솔개에 머물겠습니까?“라 하니

부친의 친구였던 교리 강필로(姜必魯)와 자학 박상혁(紫壑朴相赫)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공은 자호를 수오(水吾)라 하고 시를 지었는데

어지러운 세상일 나와는 관계없어 내가 먹고 내가 입으니 즐거움이

나에게 있네. 늙은이 나를 지킴은 무엇을 지킨다는 것인가.

내 본성과 분수를 지키며 삶을 마치려 한다네.“ 라 하였다.

 

일찍 여러차례 향시에는 수석을 차지 하였으나 진사시에 합격하지 못하자

유유자적하며 잃고 얻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90의 나이에도 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뜻이 통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밤 늦게라도 일어나 촛불을

밝히고 연구하여 반드시 뜻을 밣히고야 말았다. 1875년 을해에 수직으로 통정

대부 첨지중추부사를 배수하였고 1876년 병자에 벼슬이 부호군이 더 가자(加資)

되었는데 이해 정월 초하루에 성묘를 하기 위해 산 아래에 이르러 지팡이를

놓고 탄식하기를 근력이 이러하니 오래 살지 못하겠구나.”라 한 것이 바로

돌아 가시기 한달 전의 일이었다. 향년 89세에 시를 지었는데내 나이 여든

아홉이니 다행이 허 미수 선생의 나이를 얻었다네. 벼슬하고 안하고는 다르지만

마음의 기약은 스스로 저버리지 않았네.“라 하였다(진양속지. 고성지)

 

 ㅇ상갑(祥甲 20)

자는 낙현(洛見)이며 호는 구헌(懼軒)이다. 공은 찰방공 최진호의 7세손이며

산포공 최익대(崔益大)의 손이다. 공은 어릴때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는데

아이들과 늘 놀때에도 가벼운 말이나 욕설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조금

장성해서는 문장이 날로 진보하여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825년 순조 을유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리하고 입재 정종로 선생, 강고 류 선생 문하를 드나들며

의리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디. 이 때부터 오로지 심성을 수양하고 보존하는

공부에 전념하였고 호를 구헌(懼軒)”이라 하였다.

공은 만년에는 긴 대나무 숲과 그윽한 골짜기(안선방)에 서당을 지어 여러

집안의 몇 천권의 책을 사드려 소장해 놓고 날마다 그곳에서 거처하며

유유자적하였다.일찍 자제들을 가르치면서 너희들이 선조의 근면함과 노력을

머리에 새겨두고 농사일에 게으리 하지 말라고 타일러 3번이나 반복하였다.

(진양속지. 환여승람. 고성지

 

 ㅇ제태(濟泰 20)

자는 이앙(而仰)이며 호는 송와(松窩)이다.공은 모산공 최기필(崔琦弼)9세손이고

귤하공(橘下公) 최식민의 아들이다. 공은 곧 집안의 화목함과 두터움,단아함과

순수함을 천성으로 타고 나서 효성과공손함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타고날수 있었다.

유학(儒學)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집안의 분위기에 젖어들어 배우게 되었으며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을 알게 되었다.총명하고 예민하여 자신이 모자라는 부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여 결국에는 만족할만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처음 소학을 배우면서 동학들에게 말하기를학문은 장차 행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니 행하지 않으면 배우지 않는 것이나 같다. 내가 배운바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이있으면 서로 꾸짖어서 함께 좋은 곳으로 나아가자.“고 하였다.

 

고금의 격언을 들으면 그때마다 잊지않고 반드시 집안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었는데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리는데 일조가 되었다. 매월 초하루에

공자와 주자의 초상에 예를 갖추고 강의를 행하였는데 모두 선친 식민공의

뜻이었다.부모님이 연로하게 되자 집안의 일을 맡아 잘 처리하여 가난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을 몸소 처리하여 어버이 뜻을 다 채우지 못할까 근심하여

항상 얼굴과 말에 드러나 있었다. 남매가 7명이 였는데 늙을 때까지 재물은

따로 가지는 일이 없었으며 한 집안에 살면서 끊임어ㅂㅅ이 학문을 토론하고

질문하여 온 집안이 화기애애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누구의 집은 형제가

한 몸과 같으며 형제이면서 동시에 스승과 벗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숙부 계남공 숙민의 주선으로 노사 기정진(蘆沙奇正鎭)을 스승으로 섬기

면서 주리학(主理學)을 배우고 실천하였다.(진양속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