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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 주요인물(主要人物 - 10) 충의(忠義)-우순(宇淳) [4]

by choijooly 2024. 5. 15.

 

8. 주요인물(主要人物)

10)충 의(忠義)- (4)

 

우순(宇淳 23)

공은 조선조 말엽인 순조(純祖)임진(1832)년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학동마을에서 출생하였고, 공의 호는 서비(西扉)이며,의민공 최균의 후이다.

고조(高祖)는 최광언공 (崔光彦)이고 증조(曾祖)는 최상집공(崔祥集), 조부(祖父)

최필홍공(崔必鴻)이며 농암공(聾菴) 최백진(崔百鎭)의 아들이다.

공의 원래의 호는 청사(晴沙)인데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한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지내다가 결심한 바가 있어 어느날 갑자기 가솔들이 기거하며 출입하던

대문을 서쪽으로 옮겨내고 서비(西扉)” 라는 호를 쓰면서 해가 서쪽으로 기울 듯

언젠가는 일본도 서편으로 지는 햋처럼 몰락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교훈을

일깨워 자손들을 훈도하였다. 공이 태어나 성장할 이 무렵은 조선왕조(朝鮮王朝)

말기인지라 외척 세도정치가 성행하여 나라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한 때였다.

이러한 난세(亂世)에 성장하게 된 공은 남두(南斗) 송휘순(宋彙純)의 문하에 들어

학업을 닦다가 부명(父命)으로 과거에 등시하게 되는데, 공은 청운의 꿈을 안고

설레는 마음으로 과거장에 들어 가는데, 어떤 낮선 사람이 찾아와 은근히

말하기를 아주 쉽게 급제할 수 있는 길이 있으니 얼마간의 돈을 내놔라.”

흥정을 붙여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성품이 대족 같았던 공은 선비가

과시의 급제를 어찌 돈우로 흥정하여, 스스로의 지혜와 영혼을 더럽힐 수 있겠냐?“

대노하여 일갈하고 그 자리에서 발길을 돌려 낙향하여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기를

거부하고 바깥 출입을 삼가며, 오로지 글공부에만 전념하였다는 일화가 그의

행장(行狀)에 명기 되어 있다.

 

또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온 나라가 전운에 휩싸이게 되었는 데

이때에 공은 단호히선비도 병법을 익히알아야 한다며, 이때부터 바로 손자(孫子),

오기(吳起)의 병서(兵書)를 구하여 탐독하고 이를 다른 유생들에게 권유하자

유생들 사이에선 선비가 병서를 탐독한다며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했다.

그러나 공은 장차 크게 쓰일 때가 있을 것이라며 병법을 공부하기를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는데, 이는 곧 머잖아 닥쳐올 더 큰 나라의 재앙에 대비한

원념이었다는 것이다. 1895년 동학군(東學軍)이 봉기하자 일제는 대량의 병력을

조선반도에 파견하여 동학군 토벌에 앞장서서 조선에서 독점적 군사력을 구축하여

마침내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淸日戰爭) 승리로 이끌어

청국 군을 조선에서 몰아 내게 되었다. 조선에서 세력을 완전히 구축한

일본은 당시 세력 팽창의 걸림돌이 되는 친로파(親露派)를 제거하기

위해 국모인 민비(閔妃)까지 시해하고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단발령 등 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강제로 고쳐 나갔다.

 

이때 많은 유생들이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의 강제 단발령에 대한 항거를 표방하고

일본인과 친일파에 대한 무력항쟁을 일으켰다. 공도 63살의 고령인데도 의병장이

되어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는 곧 병인양요 때 병서를 읽으면서

장치 쓰일 것에 대비한 결과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구국의 정신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득병(得病)으로

마침내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고 마는데, 이 때 주변 사람들이 공에게 잠시 피하라고

하자 숨어서 구차하게 사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다.”라고 거부하고 태연히 토벌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당시 토벌군 대장인 최섭(崔燮)은 공이 덕망있는 선비임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주변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최공의 덕망있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런 분이 와병중인데 어찌 내가 감히 어른에게 죄를 지을수 있겠는가?” 고 단호히 말하고

돌아서 가버렸다고 한다. 그로부토 5년후, 조선이 일제에 합병되자 공은 평생 왜국

(倭國)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뜻으로 호를 서비(西扉)로 개청하고 스스로

자서(自序)를 지어 울분을 토로해 마지 않았다.

 

191180살의 고령인 공은 일제가 식민지 통지를 회유하기 위해 당시 덕망있는 선비

27명에게 은사금(恩賜金)이라는 명목으로 일왕의 돈을 나누어 주는 대상으로 뽑혔으나,

공은 받지 않겠다는 뜻을 글로 써서 엄히 물리쳤다. 그러자 관원들이 일일이 찾아와서

회유하거나 화를 내거나 하다가 이마져 실패하자 헌병을 파견해 은사금 받기를 강요

하였다. 그러나 공은 불의의 돈을 내가 어찌 받을수 있겠는가?” 라며 완강히 내쳤다.

그러자 헌병이 연행해 가겠다며 포승을 내밀자 서비는 선비를 죽일수는 있어도

모욕 할 수는 없는 법인데, 80살의 늙은이를 밤에 몰아내 가기를 원하는냐?“

호통을 치고 날이 밝으면 새벽녘이라도 함께 가자고 타일렀다. 그러자 헌병들도

마지못해 수긍하자, 공은 그들을 옆방에 자게하고 자정이 되자 의관을 단정히

차려입고 뜰에 나 앉아 북방 재배한 후, 조국의 광복과 운명을 하늘에 빌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독약을 마시고 순절하였다.

 

난세를 살아가는 선비의 길은 세 갈래가 있는데, 첫째는 어지러운 세상과 맞닥뜨려

싸우는 것이요, 둘째는 세상을 등지고 수신에 힘쓰는 것이며, 셋째는 목숨을 더럽히기

보다 죽어서 의리를 지키는 길이라 할 것이다.능히 공은 난세를 살면서 목숨을 바쳐

의리를 지킨 애국열사임이 분명했다 하여 그의 유집인 서비집에는 한말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과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심재(深齋)

조긍섭(趙兢燮) 등이 그의 절의를 기린 글들이 실려있다. 뿐만 아니라 공의 고향인

고성군 하일면 학동마을에는 공의 절의를 기리는 서비정(西扉亭)이 표표히 서 있고,

학동마을 입구에도 영남이원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조성한 일백여 평 남짓한

비원에 숭의비가 서 있는데, 이 두곳은 국가보훈처가 지원 관리하고 있으며,

19901226일 에는 대통령 명의로 국가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어 공이

이 나라의 애국열사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2004310일에는 경상대학교 남명회관에서는 진주보훈

지청이 주최한 애국지사 최우순의 항일정신과 항일시라는 제목으로

학술강연회가 게최된 바 있다.(최재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