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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천(Gachen-佳川)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 주요인물(主要人物 - 10) 충의(忠義)- 종진(鍾晉)-정원(正元)[5]

by choijooly 2024. 5. 15.

 

8. 주요인물(主要人物)

10)충 의(忠義)- (5)

 

ㅇ종진(鍾晉 23)

자는 국빈(國彬)이다. 공은 현감공 최수지(崔水智)16세 손이며 증 가선대부

당상부호군공 최선식(崔善植)의 증손이고 최용기공(崔庸基公)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성품이 쾌활하고 담력과 완력이 뛰어났었다.

수렵을 생업으로 살고 있다가 산남의진 대장(山南義陣大將) 정용기(鄭鏞基)

항일군을 창설하고 있을 때,솔선하여 이에 응모하고 이규필등 제공과 더불어

각지를 분담하여 총지휘대장이 된 정환직이 진군(陣軍)을 확장할 때에 공은

죽장(竹杖) 등지로 가서 장사를 모집하였고, 다시 동해지구로 들어가서 군수품을

수집하였다. 그 때 공은 일지군(一枝軍)을 인솔하고 북동대(北東大)에 들어가서

탄약을 제조하여 각 지군에 공급하였다. 종환직이 전사하고 후계대장이 된

최세환이 남동대(南東大)릏 거점으로 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각 부서를 정비할 때에 공은 후봉대장이 되었다.

10수년간을 군진에서 종사하면서 공은 부지런하고 유능하고 용감하여 누구보다도

전우들의 많은 찬양을 받았다. 천운이 불리하여 마침내 의진(義陣)이 와해되었을

, 공은 체포되어 7년의 옥살이를 하고 출옥 후 처자를 거느리고 만주로 가서

조국 광복에 힘썼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공은 고국으로 돌아와서 해외의

동지들과 잠통하면서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원통하게도 조국광복을

수개월 앞둔 326일에 향년 61세로 별세하였다.(해평족보)

 

ㅇ정원(正元 24)

 

공의 자는 용부(勇夫)이고 통덕랑이다. 공은 혜정공 최수강(崔秀岡)

후이고, 사양공(泗陽公) 최규승(崔圭升)의 자로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에서

태어났다.공은 기미년 3월 중순 독립선언문을 입수하여 허재기(許在其)

함께 의거를 모의하고 지방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들은 비밀회합을 개최하고 공과 허재기를 비롯하여 아우 정주공(正周公)

그리고 최낙희(崔洛僖),최낙종(崔洛鍾) 양공 등으로 320일 국천사장

(菊川沙場)에서 집합하여 거사키로 하고 필사한 독립선언서를 각 리 동에

돌려 거사 당일의 참가를 연락하고 태극기를 비밀리에 많이 만드는 등

의거 준비에 분망하였다. 한편 공과 그들 주동자는 회화면 동지인 서찬실(徐贊實).

김갑록(金甲錄),김동기(金東琪)등에게 연락하여 320일 배둔 장날을 기하여

그 곳에서도 기의(起義)하고 상호 합류하여 대대적인 시위 전개를 밀약하였다.

 

320일 오전 9시 집합 나팔소리에 수 많은 군중이 국천사장에 운집하였다.

첫 번째 등단한 공은 장중한 목소리로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어서 등단한

허재기는 대한민국 만세를 고창하니 산이라도 무너지듯 하였고 태극기는

아침 해에 비쳐 더욱 빛났다. 시위 군중은 주동자를 선두로 만세를 부르며

배둔 장터로 향하였다.도중에서 일본 헌병의 제지를 받았으나 그들은

용감하게 차단선을 뜷고 배둔 장터에 당도 하였다.

 

여기에서 두 주동자인 공과 공의 아우 정주공(正周公) 허재기 등은 일본헌병의

추적을 뿌리치고 무사히 구만면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날 밤에 허재기가

작성한 한인관리사퇴(韓人官吏辭退) 권고문을 등사하여 면사무소 앞에 붙이고

그 다음 날 각처의 관공서에 발송하였다. 이 때 일본헌병들이 전날의 의거

(義擧) 주모자들의 검거 체포에 광분하니, 공과 허재기,최정주공 등은 몸을

피하여 우선 그들의 호구를 벗어 났다.

 

공은 피신 수개월 후 도일(渡日)하였다. 그는 적도 동경(敵都東京)에서 동향의

최낙종공(崔洛鍾公)과 같이 재일교포 노동자를 규합하여 동흥노동맹회(東興

勞動盟會)를 조직하고 박춘금(朴春琴)이 주도하는 친일단체인 상애회(相愛會)

대항하여 교포 노동자의 권익옹호에 노력하였다.또한 그는 서상한(徐相漢),이영

(李英), 변영호(卞榮昊) 등 동지와 제휴하여 노동월간지와 잡지등을 발간하여

해외 동포들에게 배포하여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공은 국내의 3,1 독립운동의 여파가 다소 진정되자 국내로 돌아 와 다시

국내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고 비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10월 만주의 독립군 양성기관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윤영백

(尹永百)을 밀파하여 의용군 모병과 군자금 모금을 하도록 하였다. 1921

2월 산청군 신등에서 모금 활동중 밀정에게 탐지되어 공은 일본경찰에

체포 되었다. 1921411일 부산지법 진주지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일제의 잔인무도한 장독과 겹친 옥고로 순국하였다.

조국 광복 후 정부에서는 그 공적을 기려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 하였다.(고성의 독립 운동사)